3.三國時代 多角形(8각 9각 12각) 건물과 前方後圓墳 발생의 근원에 대한 試論...(韓宗燮)

 

하남지역의 방어체제 연구노트/새로운 형태의 산성방어체제인 옹로를 중심으로 (尹 明 喆)

Ⅰ. 서론
Ⅱ. 하남지역의 군사적 가치와 배경
. 새로운 방어체제 형태
Ⅳ. 맺음말

Ⅰ. 서론
하남지역은 한강의 이남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서 매우 광범위한 지역을 지칭하였으나, 현재는 경기도의 하남시와 광주군 일대의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개념으로 보면 고덕동·암사동 등 강동구 일대의 한강변 일부지역도 해당된다.
이 지역은 근래에 백제의 초기수도였던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한양대학교가 6차에 걸쳐 二聖山城을 발굴하였고, 동국대학교가 桐寺址를 발굴하였으며, 세종대학교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현재는 校山洞의 궁궐지로 추정하는 지역을 畿甸埋藏文化財硏究院이 발굴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서 이 지역에서 고대문화가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고대문화의 유산으로 여겨지는 유물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어 왔다. 이 지역이 고대국가, 특히 백제의 수도와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는 유물발굴을 통한 연구와 충분한 검토가 있은 후에 판단이 될 것이다.그런데 이 지역에는 알려진 二聖山城 외에도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을 방어시설물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필자는 지형관찰과 면밀한 현장답사를 통해서 이러한 방어체제의 실상을 밝혀나가고 있다. 아래 글은 그동안 관찰되었고 연구되었던 방어체제 가운데 1차적으로 일부를 선택해서 그 실상을 밝혀보고자 한다. 하남지역의 방어체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살피는 첫 작업이므로 자료를 소개하는 수준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 후에 계속해서 이 지역의 방어체제에 대한 자료를 소개할 것이며, 논문들을 발표할 예정이다.

Ⅱ. 하남지역의 군사적 가치와 배경
1. 역사적 환경 검토

하남이라는 용어는 ≪三國史記≫ 백제본기 溫祖王 즉위조에 처음 나온다. 즉 '溫祖가 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명 신하의 보좌를 받아 나라이름을 十濟라고 하였다.'는 기사이다. 미사동·암사동·풍납동에서 선사유적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한강변에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산동 및 주변지역에도 고인돌들이 산재해 있어 청동기시대에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은 지리적 위치와 지형으로 보아 한반도 중부의 전체지방을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특히 고대에는 水路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이동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비중이 높았으므로 역사발전에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다.
한강이 가진 또 하나의 이점은 바다와의 관련성이다. 한강이 끝나는 지점은 경기만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경기만은 한반도 중부에서 가장 큰 만으로서 남북종단항로와 동서횡단 항로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이다. 경기만으로 모여드는 강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광범위하게 퍼진 하계망을 이용하여 내륙의 상당한 지역을 장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 한강은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으로 영향력이 강할뿐 아니라 가장 넓은 범위에 걸쳐 퍼져 있다. 한강 하류를 장악하면 경기만을 장악하고, 경기만을 장악하게 되면 河系網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제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지역인 현재의 강동구, 송파구, 하남시, 광주지역 등은 더욱 중요하다. 이른바 水陸交通과 海陸交通이 교차되면서 상호호환성을 지닌 중계지역이다. 이곳에 설치된 도시는 이른바 河港都市와 海港都市의 성격을 이중적으로 가진 것이다.
이러한 지리지형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정치세력들이 일찍부터 태동하였고, 강력하게 발전하였다. 역사시대에 들어와 백제가 먼저 이 곳을 차지하였다. 삼국사기에는 溫祖王이 河南 慰禮城에 도읍을 정한 이래, 그 후에도 몇차례에 걸쳐 수도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이 때의 하남위례성 혹은 漢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예를 들면 '夢村토성설'이 있고, 최근에 들어서는 대대적인 발굴과정과 발견된 유물을 통해서 다시 '風納洞토성설'이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 丁若鏞이 ≪여유당 전서≫에서 주장하였으며, 李丙燾, 千寬宇 등이 주장하였다가 얼마전 부터 다시 표면화되기 시작한 소위 하남시인 현재의 校山洞, 春宮洞 일대라는 설이 있다.
백제는 역사상의 개념인 하남지역을 중심으로 약 500여년 동안 발전을 하였다. 4세기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475년에는 장수왕이 한성을 전면적으로 공격하였다. 양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蓋鹵王이 전사하면서 수도가 함락당하고, 결국은 황급하게 남천하였다.
그 후 하남지역을 비롯한 한강주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서 남방경영의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최근에 발굴된 아차산의 보루들, 다시금 군사유적으로 인식된 九宜洞의 고구려유적, 夢村토성에서 발견된 토기 등은 이 지역이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553년 2차 나제동맹이 깨지면서 이 지역은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진흥왕은 이 지역에다 新州를 설치하였다. 신라는 한강변이 가진 전략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가발전은 물론 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하남지역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긴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남지역은 전개된 역사적인 배경으로 보아 매우 복잡한 역사의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하남시 및 광주군일대와 고덕동, 천호동, 암사동 한강유역일대는 시대를 불문하고, 또는 백제의 수도여부를 떠나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곳이었다.

2. 자연환경의 검토
한강 유역의 광범위한 지역 가운데에서 현재의 하남시 일원인 춘궁동 일대와 교산동, 項洞, 下司倉洞은 자연지형상으로 보아 적으로부터 방어를 완벽하게 해야하는 정치·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강 이북에서 남진을 하여 남양주시의 여러지역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에 이 곳을 돌파당하게 되면 이 작전이 완전하게 성공으로 종결된다. 현재의 上山谷洞, 下山谷洞 골짜기를 통과하여 남한산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고, 남한산성 지역은 매우 긴박한 상태에 처해진다. 또한 남한산성을 넘을 경우에는 성남, 용인 등이 위험해진다. 그리고 현재의 광주지역을 거쳐 이천 등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이천, 장호원을 거치면 충주지역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또한 고덕동, 명일동, 암사동 등을 제압할 수 있으며, 현재 하남 위례성지의 후보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동토성 및 몽촌토성 등의 지역을 외곽 포위하여 쉽게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
한편 한강 이남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북진을 시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이 지역을 거점으로 대규모의 군사들을 진주시키고, 이성산성 등 요충지를 전략사령부로 삼아 한강변의 여러지역을 활용하여 화려한 공격을 펼친다면 도하를 비교적 용이하게 성공시킬 수 있다. 峨嵯山과 龍馬山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고구려가 보루들을 열지어 구축한 것은 이러한 전략의 가능성과 효용성을 반증한다. 또한 하남지역이 한 나라의 수도였거나 중요한 행정치소가 있었고, 혹은 군사도시였을 경우에는 공격 및 방어를 위한 이 지역의 군사체제는 매우 치밀하고 완벽하게 구축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의 자연조건은 북진보다는 한강주변, 특히 한강을 건너 남진해오는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군사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전반적인 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남지역은 한강을 북으로 하고 정남에는 남한산이 있다. 동쪽에는 남한산성의 벌봉(515m)에서 길게 능선이 이어지다가 客山(291m)과 만나면서 교산동 일대를 동쪽에서 바로 감싼다. 서쪽은 역시 남한산에서 북쪽방향을 향하여 대각선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널무늬고개를 지나 金岩山(322m)을 이루면서 계속 북으로 내려간다. 객산과 금암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좌우로 뻗은 이 두 산 사이에는 매우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를 德豊川(8.5km)이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고 있다.
이 공간 안이 '고골'로 불리워졌던 춘궁동과 교산동이다. 그런데 이 삼각형의 공간 밖에도 또 하나의 너른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즉 서쪽은 금암산이 향교고개를 가운데 두고 二聖山(210m)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리고개를 거쳐 황산(78m)을 지나 한강가인 船洞의 龜山까지 이어진다. 동쪽은 객산이 내려오다가, 그 자락이 희미해지면서 평지에 닿는다. 그런데 객산의 동쪽 너머에는 검단산(659m)이 있고, 그 사이에는 폭이 약 2∼300m 정도 되는 골짜기가 은고개에서 부터 한강로 이어지고, 그 사이인 객산 바로 바깥쪽으로 山谷川이 한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객산 끄트머리인 동경주에서 희미해진 산자락은 몇군데의 야트막한 구릉을 만들다가 한강가에 와서 黔壇山의 줄기와 만난다.
현재 하남시의 춘궁동, 교산동지역과 시청 등이 있는 新長, 倉隅, 德豊, 豊山, 望月洞 등의 지역을 전체적으로 보면 남한산성을 부채의 꼭지로 삼아 살이 좌우로 활짝 펼쳐져 삼각형을 이루고, 다시 또 한번 너른 삼각형을 이루면서 한강의 흐르는 물과 만나고 있다.
정치·행정공간뿐 만 아니라 활발한 경제공간으로서의 조건 등을 고려할 때 이 지역은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 나라의 중심부로서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나 왕성은 군사적인 측면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은 일정한 규모의 터가 있다. 또한 자연조건과 지형을 고려할 때, 소위 하남위례성터로 추정되는 몇 곳 가운데에서는 방어체제를 구축하기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자연스럽게 방어막을 이룬 크고 작은 산봉우리와 길게 뻗은 능선, 골짜기, 그리고 내(川)와 한강을 自然垓字로서 활용한다면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완벽한 방어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특히 내부를 방어하는 데에는 더없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이 곳과 유사한 방어체제를 구축한 지역이 몇 군데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큐슈 북부의 타자이후(太宰府) 방어체제는 유의할 만하다. 백제유민들은 664년에 벌어진 나당연합군과의 마지막 싸움인 白江전투에서 패한 이후에 일본열도로 대거 건너갔다. 그리고 곧 왜인들과 함께 몇 년간에 걸쳐 對馬島(烽燧·防人·金田城)에서부터 큐슈북부를 거쳐 세토(瀨戶)내해의 여러 곳, 심지어는 나라(奈良)지역에 까지 산성 등 방어체제를 긴급히 구축하였다


모두 토호슌쇼(答 春初) 등 망명한 백제인들이 짧은 시간에 만든 소위 조선식 산성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타자이후 방어체제는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은 전방 방어사령부 겸 행정관청이었다.
타지이후는 해안에 있었던 那津官家를 후퇴시켜 약 20 여km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政廳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산개된 형태의 해안선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다가 잘록해지는 깔때기의 목 부분에 흙으로 일종의 제방형태의 차단성을 쌓았다.
바깥쪽인 하까다 쪽으로는 급경사로 만들어 적의 침입을 방어한 다음에, 중간에는 나무통을 넣어 유사시에는 물을 흘려 보내 수공(水攻)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전체 길이는 1.2km인데 맨아래 제방의 폭은 80m에 달하고, 높이는 13m이다. 그 것 말고도 주위에는 보조제방이 몇 개나 더 있었다. 내부에는 정청이 있고, 정청의 바로 옆인 대야산에는 북쪽을 방어하는 오오노성(大野城)을 쌓았고, 서남쪽으로는 유명해로 상륙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키이성(基肆城)을 쌓아 마치 펼쳐진 양 날개처럼 정청을 보호하였다.
필자는 하남지역을 조사하는 처음 순간부터 양 지역간에는 자연지형 및 이를 활용한 방어체제가 유사함을 느꼈다. 특히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責稽王 원년에 蛇城을 쌓고, 蓋鹵王 21년에는 사성의 동쪽에서 강변을 따라 崇山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그 제방으로 추정되는 것을 한종섭씨와 오순제씨가 조사를 통해서 추정하였고, 후에 한종섭과 필자가 검단산의 바로 밑에서 그 동쪽 시작점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발견하였다.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개념과 형태는 타자이후의 수성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 현재 하남지역의 자연환경을 조사하고, 남아있는 구조물 등을 면밀하게 살펴본 결과, 이 일대에는 중요한 정치공간으로서 기능을 한 흔적들이 곳곳에 구축되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큰 건물터, 크고 작은 절터, 탑지, 고분의 흔적들이 있었고, 주변에는 고려 및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편들이 널려 있었다. 또한 주변의 능선과 골짜기에는 물론이고, 내부인 평지의 곳곳에 솟아있는 구릉이나 동산, 계곡 등에도 인공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방어시설일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필자가 한종섭씨와 함께 방어체제를 조사하면서 개념화한 것들이 있었다. 예를들면 교산동·춘궁동 등 옛 고골의 내부는 자연과 인공을 교묘하게 배합하여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구획을 지어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차단격실구조'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上·下山谷洞 일대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으로부터 춘궁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차단벽의 기능을 한 자연지형물(인공의 흔적도 있다.)들이 요소요소에 있다. 그 외에 하남지역과 외곽의 곳곳에는 크고 작은 형태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방어체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이루어진 방어체제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인공으로 구축하였고, 흔적이 완연하며, 본격적인 형태를 갖춘 큰규모의 산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하남지역에서는 이성산성 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등이다. 다음 기회에 상론할 예정이지만, 중요하고 다양한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진 방어체제는 大城 뿐만 아니라 中城, 小城이 있고,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매우 복합적이고 유기적으로 구축하였다. 보통은 기본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보위시설들이 있고, 그 외에 방어지역 전체를 가운데 두고, 그것을 지키는 중첩적인 방어시설들이 또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방어체제들의 기능과 위치 등을 고려하여 守城·衛城·遮斷城 및 遮斷壁·哨所·堡壘·津城 등의 개념으로 구분하는 것이 방어체제를 이해하는데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다양하고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방어체제 가운데에서 하남지역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그 중에서도 1차적으로 새로 발견한 방어체제를 소개하려고 한다.

Ⅲ. 새로운 방어체제 형태
하남지역은 향토사학자인 韓宗燮씨(현재 하남시 문화재 전문위원)가 10여년전부터, 역사를 공부하는 吳舜濟선생(현재 명지대 사학과 강사)이 약 7년 전부터 면밀하게 조사를 하였고, 저서를 통하여 백제의 수도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백제문화연구회가 창립되어 춘궁동에 거주하는 김종규씨, 김종환씨 등 향토사학자와 강찬석, 김명윤 교수 등 기타 역사학 비전공자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조사가 되었다.
필자는 교산동 내부에 있는 한 부분이 인공적으로 구축된 성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지도위원의 자격으로 이 지역 조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5월까지 백제문화연구회회원들과 함께, 때로는 혼자서 방어체제를 집중적으로 조사하였으며 그 후에도 조사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방어체제를 몇 종류 찾아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일종의 참호 내지 교통호의 모습을 띈 시설물들이다. 필자는 이를 고구려의 甕城구조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고 '甕路'라고 명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성이 있고, 가장 대표적인 몇 지역을 선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한종섭씨는 ≪위례성백제사≫에서 객산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곳에 있는 군사시설로 보이는 몇 군데를 조사하고, 土門이라고 명명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1. 덜미재 옹성구조
덜미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암동과 춘궁동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상에 있는 고개이다. 지형이 특이하다는 한종섭씨와 김종규씨의 안내로 '백제문화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金岩山의 끝능선이면서 고개마루인 '덜미재'를 조사하였다. 이 덜미재는 원래는 '벌미재'라고 불리워졌으나 김종규씨가 본래 이름을 찾아 덜미재라고 부르고 있었다. 지금은 廣岩洞(원래의 명칭은 고인돌들이 널려 있었으므로 너분바위로 불리워졌다.)에서 항동과 하사창동으로 넘어가는 포장도로가 이성산과 금암산을 가르는 향교고개를 통과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의 주민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전에는 이 덜미재가 통상적으로 다니던 길이었다.
필자는 금암산의 지형을 관찰하고 위치에 따른 역할을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능선을 활용한 토성이 있었을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넘어 다니는 주요한 길목에 크고 작은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중요한 장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덜미재이다.
필자는 덜미재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지형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구축한 것임을 순간적으로 알았다. 고구려의 성곽에서 보여지는 옹성문과 개념은 물론 기본구조도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흙으로 이루어진데다가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전술적으로 자연지형에 가깝도록 의도적으로 위장하여 축성한 것이므로 얼핏 보아서는 단순한 자연지형으로 보였다.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이것은 일종의 甕城형태와 가능을 한 옹성문이고, 여러개의 방어막을 겹쳐서 설치한 형태이었다. 필자는 모양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편의상 '쌍삼지창형(雙三枝槍形)' 라고 명명하였다.

세 개의 뾰족한 창을 가진 三枝槍이 양쪽에서 엇갈리면서 마주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위의 자료들을 근거로 이 방어체제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광암동쪽에서 시작되는 형태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음식점이 있는 언덕을 올라서서 경사가 급하지 않은 능선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타난다. 그 앞에서 30여m 전진하면 약간 평평한 지역에 이르러 체제가 시작된다. 앞을 보면 좌우 양쪽에서 능선이 흘러내리다가 만나 잘록해지는 전형적인 고갯마루 모습이다. 좁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앞을 가로막으면서 오른쪽에서 첫날개가 시작되어 진행방향쪽으로 둔덕이 이루어진다. 반면에 왼쪽은 폭 2m의 공간을 통로로 만들어 놓고, 한 발자국 뒤에서 엇갈리면서 역시 진행방향을 향하여 둔덕이 뻗어나간다. 약간만 주의를 하면 한 눈에도 항아리형태인 옹성구조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 통로를 돌아 전진하면 오른쪽으로 약간 (0.6m)돋아오른 방어막이 가로막고 있다. 물론 왼쪽은 높은 언덕이다. 다시 오른쪽에 약 5m 높이의 무덤 같은 언덕이 있고, 거기서 문을 향해서 능선이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그 사이는 공간이 골로 되어있고, 왼쪽에서 다시 산줄기가 내려온다. 또 오른쪽의 가장 높은 곳(약 8m)에서 고골(현재 항동)쪽으로 휘어지면서 날개가 흘러내리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3짝의 세트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인공을 가미한 언덕에서 매복한 채 돌을 굴리거나 활 또는 창을 던져 적을 포위한 채 마음놓고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구조이다. 다소 복잡한 표현이 되는데 위의 그림을 참조하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결국 3개 정도의 복합방어막이 형성된, 말 그대로 옹성형태가 이곳의 방어형태이다. 이 방어막은 주로 고골의 반대편 쪽인 광암동에서 올라오는 방향에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내부로 들어오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 이 구조 안에 들어오면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전멸당할 가능성이 크다.문지에서 고골 방향으로 오른쪽 골짜기가 시작되는 경사진 능선에서 삼국시대의 토기편을 발견하였고, 원형에 가까운 석실묘도 발견하였다. 그 외 이성산성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도굴된 석곽묘, 석실묘가 많이 있다.필자는 이 구조를 조사한 다음에 덜미재와 반대편인 동쪽의 산길에도 이러한 유사한 방어체제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동행하였던 김종규씨는 필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이 세미골이며, 그 곳에도 특이한 형태의 장소가 있다고 한종섭, 오순제씨가 알려주었다.

2. 세미골 옹로
하사동에서 천황사터를 지나 서쪽으로까지 와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무당집이 나타난다. 그 바로 위 작은 폭포를 옆으로 보면서 다시 완만한 산길을 올라가면 작은 골짜기들이 있고, 왼쪽에는 화전을 한 흔적이 제법 넓은 평지로 남아있다. 이 곳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건너 산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가 나타난다. 남한산성의 벌봉(蜂峰)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客山으로 이어지는 교차점이다. 고골 쪽에서 이 곳을 넘어 내려가면 하산곡동의 막은데미 골이 나타난다. 이 골짜기 길은 '세미골'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그 명칭의 유래에는 여러설이 있지만 예전에 세곡미를 날랐던 길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다.그런데 이곳 역시 매우 독특한 방어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고개의 마루부분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 동원됐던 포크레인의 작업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휑하니 넓기만 하다. 그런데 고골쪽으로 내려가는 도로길 바로 옆의 안쪽으로 골같은 길의 흔적이 보였다. 한 눈에도 인공적으로 구축된 방어체제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백제문화연구회의 회원들과 함께 조사를 하였으며, 후에 몇 차에 걸쳐서 필자는 탐험문화연구소의 연구원들과 함께 조사하고, 입체측량을 실시한 후에 도면을 떴다. 그리고 건축설계사인 이선호선생이 스케치를 하고, 사진은 전성영 작가가 찍어 자료화 시켰다.이 곳은 마치 뱀이 꾸불꾸불 몸을 휘면서 걸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전형적인 S자 형태로 되어있다. 고골쪽의 시작하는 곳에서부터 상태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원래 도로를 걸어 올라가다가 왼쪽 숲속으로 숨겨진 골짜기길이 있었다.

공격군은 수차례에 걸쳐 굽은 길을 통과해야 한다. 골짜기 등에 많이 사용하는 구조이다. 화살표는 공격군의 진행방향 빗금친 부분은 인공으로 만든 방어시설폭 1m∼2m 정도의 길을 따라 약 10m 정도의 골을 전진하다보면 곧 각도가 심하게 구부러지면서 길이 사라진다. 불안감이 생기고, 더 이상 전진할 기분을 사라지게 만든 구조이다. 그러니까 지형을 모르는 공격군은 불과 1∼2명만이 움직일 수 있는 협소한 길을 주위를 하면서 천천히 전진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어느 정도 앞에 간 사람은 심하게 구부러진 곳을 통과하면 뒤에서 오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게 된다. 이른바 시계의 사각지대가 된 것이다. 앞 뒤 간의 연결이 끊어지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불리하고 위태로워진다.
통로아래는 그러한데 양쪽 위는 높이가 10m 이상 되고, 언덕위에는 인공으로 쌓은 만두같은 봉우리들이 솟아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조그만 봉오리들은 좌우가 교차되면서 높낮이가 다른 채 이어지고 있다. 즉 아래에서 볼 때 좌측의 언덕이 높게 솟아있으면, 오른쪽은 비교적 낮고, 다음에 오른쪽의 언덕이 높게 솟아있으면, 반대로 왼쪽의 언덕이 상대적으로 낮다. 결국 아래통로에서 올려다볼 때에는 지그재그 형태로 만두같은 봉오리가 양쪽으로 봉긋 솟아있는 것이다.
필자가 매복초소라고 명명한 만두형 둔덕은 자연능선으로 위장하며, 공격사면을 넓히면서, 방어군이 공격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10m∼15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이러한 언덕 위에 매복하면서 아래를 힘겹게 지나가는 적들을 급습하는 것이다.
1구간을 통과해 더 전진을 시작하는 장소에는 오른쪽으로 폭 1m정도의 길이 하나 나 있었다. 2구간으로 명명한 이 통로는 지금은 바깥의 도로와 이어지고 있는데, 특수한 목적을 위해 인공으로 파놓은 매복장소였다. 즉 옹로의 중간쯤 되는 지점의 한군데를 인공적으로 파서 일종의 교통호모양의 통로를 만든 것이다. 많은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아래에서 전진해오는 적을 공격하거나, 혹은 적군을 일단 통과시킨 다음에 위와 아래에서 협공할 수 있게 한 장치이다. 이 통로의 왼쪽입구에는 한손 혹은 양손으로 부담없이 잡고 던질 수 있는 돌멩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놓여져 있는 위치나 형태로 보아 군사용으로 추정되지만, 사용한 시대는 알 수가 없다.이 옹로는 뱀모양으로 구부러지면서 계속 이어지다 고대와 만나면서 일단 끝이 난다. 약 100여 m가 넘는 구간을 인공적으로 통로를 만들어서 통행하는 사람들이 그 길로 지나다닐 수밖에 없게 만든 구조이다. 적군이 침입할 경우에는 전진속도를 느리게 할뿐만 아니라, 매복습격을 하여 몰살시킬 수 있는 아주 독특하고 교묘한 구조였다.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자연스럽게 위장을 하였으므로 얼핏보면 자연지형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발견 이후에도 자연지형이라고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시각적으로도 인공이 가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는 면밀한 조사를 통해서 인공구조물임을 확인하였다.필자를 비롯한 백제문화연구회는 세미길의 주요한 매복초소와 앞통로의 아랫부분 초소로 여겨지는 몇 군데 부분의 지표면을 살펴보았다. 인공을 가한 자연석들, 두주먹으로 감싸안을 만한 크기의 돌들이 약 1평정도의 넓이에 차근차근하게 깔려 있다. 이는 인공적인 흙더미기 무너지지 않게하고, 한편으로는 활동의 근거지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옆으로 들어오는 통로 왼쪽에도 돌들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필자가 1초소로 명명한 능선부분은 주먹보다 큰 크기의 돌들이 열지어서 촘촘히 쫙 깔려 있었다. 평상시에는 순찰병이 안정되게 오고갈 수 있게하고, 유사시에는 전투병이 서서 활동을 편하게 한 구조이다. 이러한 '매복초소'나 '甕路', '暗路' 등은 고구려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고골쪽의 옹로가 끝이 난 고개마루는 성문지였을 가능성이 높으나, 왼쪽 능선의 무덤을 만들 때 포크레인이 까부셨으므로 원형이 보존되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거주한 김종규씨의 증언에 의하면 전에는 폭이 훨씬 좁았으며, 양 쪽에서 흘러내려온 능선날개가 엇갈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덜미재의 변형옹성구조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이 고개마루에서 하산곡동으로 내려가는 길도 역시 굴곡이 진 S자 형으로 이루어진 옹로구조였으나, 고골쪽 만큼 폭이 좁거나 굴곡이 심한 편이 아니다. 넘자마자 개활지가 보이며 적들이 공격할 때 많은 군사가 일시에 공격할 수 있는 조건이 분명히 있다. 문지를 통과하자마자 왼쪽으로 만두형의 언덕이 있고, 굽은 길로 10여 m 내려가면 오른 쪽에는 돌을 쌓아둔 흔적들이 남아있다. 다시 아래부근에 평평한 지형에 무덤이 있고, 그 밑으로는 아래로 전개되는 통로와는 다른 골짜기가 넓게 전개된다. 일상적인 통로는 아니지만 유사시에는 군사들이 충분히 올라올 수 있다.
무덤을 지나 약 20m를 지나면 길 양쪽에 인공으로 쌓아둔 토루가 있다. 그 곳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그 길을 47m 정도 지나면 끝에는 4매복초소라고 명명한 방어막이 있는데, 성문 앞에 있는 적대와 같은 기능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곳에서 일단 옹로는 사라지고 세미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봉화골의 끝까지 내려와 下山谷川과 만난다. 골짜기는 10리가 못된다고 한다.골짜기의 끝 부분에서 내려가는 방향으로 오른쪽에 높게 솟은 봉우리가 있다. 벼랑 밑으로 산곡천이 흘러가고 있는 이 곳에서는 주변이 보이고 들판과 검단산, 그리고 한강으로 나가는 길의 상당한 부분을 조망할 수도 있고, 봉화골로 하여 세미골을 통과하려는 적을 감시하고 방어할 수 있다. 이 곳에서 필자와 한종섭씨는 돌을 섞어 인공으로 쌓은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 언덕 아래에 딸린 밭에는 토기와 기와편들이 무수히 있었다. 일부는 명문의 흔적이 있고, 고려시대 이전의 연질, 경질 토기편들과 붉은색, 격자문, 점선문 등의 기와 등을 많이 발견하였다. 이 곳은 '막은데미'라고 불리우는데, '동수막'이라고도 한다.고구려군이 침입했을 경우, 창우동쪽에 도착해서 (강을 건넜을 수도 있음) 검단산과 객산 사이의 골길을 통과해서 이 곳까지 도착한 다음에 봉화골로 들어와 세미길을 통과하면 고골내부의 중요한 시설물들의 배후를 칠 수 있다. 이 세미골과 막은데미골 사이에는 성골이 있어 이러한 곳에 방어체제가 구축되었을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3. 홍두깨 바람재의 변형옹로들
남한산성의 동쪽 암문을 지나 벌봉(521m)성을 통과해 계속가면 暗門이 나타난다. 다시 내려가면 옛고골쪽과 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전개된다. 어느시대에 어떤 용도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능선의 일부분은 삭토하여 토성의 기능을 하게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암문에서 약 500m 정도 내려가면서부터 순수한 자연지형이 아닌 인공을 가한 흔적들이 나타난다. 세미골 등에서 발견한 옹로와 유사한 형태이고, 동일한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어체제들이다 이 방어체제들은 세미골의 옹로들이 골짜기 내부에 있는 것과는 달리 능선길에 여러가지 형태로 되어 있다. 기존의 자연지형을 쉽게 변형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어 더욱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형태도 아주 다양하여 때로는 판단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필자와 백제문화연구회의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옹로 형태는 이 능선 상에 10여개 이상이 있다. 가장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 있는 곳은 일명 홍두깨바람재란 곳의 몇 군데이다.가장 전형적인 이 곳은 길이가 120여m 정도인데 폭 1.5∼2m의 폭으로 구불구불하게 s자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양쪽으로 이중의 둔덕을 만들어 자연스러움을 위장했고, 매복장소로도 사용했다. 이곳은 세미골과 달리 여러형태가 혼재되어 있다. 몇 개의 인공언덕을 양쪽에 엇갈려 가며 구축한, 마치 태극의 음과 양처럼 엇갈려 있는 둔덕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그 선이 마주치는 좁은 곳으로 길이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세미골처럼 구불구불 뱀이 걸어가는 것처럼 비교적 평면상태에서 휘어진 길을 만들고 역시 양 옆의 윗쪽에는 만두모양의 언덕을 만들어 은폐와 매복하는 장소로 삼았다. 또 중간에 담처럼 일직선의 지형을 만들어놓고 바깥의 양쪽으로 둥그런 둔덕을 쌓아 그 사이를 통해서 길을 가도록 하여 놓은 형태도 있다. 이것은 이동하는 군사를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다.

 

화살표는 공격군의 진행방향이고, 점선은 현재의 도로이다.사선인 부분은 둔덕형태이고, 내부의 하얀부분은 움푹파였거나 평지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항아리의 속같은 구조이다. (이선호 그림)

능선에 변형옹로들을 만든 목적은 세미골처럼 고골 내부로 진입해 들어가는 적을 골짜기에 몰아넣어 협살하려는 것이 아니다. 객산에서 남한산성 지역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경우, 혹은 반대로 남한산성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가 고골쪽으로 떨어지는 경우, 아니면 객산까지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중간에서 방어하는 경우 등 다양한 통행을 방어하는 것이다. 즉 능선방어용인 것이다.

4. 막은데미 변형옹로
이 곳은 고골 내부의 상사창동의 중촌마을에서 상산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근처이다. 문지로 추정되는 곳은 이미 다 무너져 내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인공의 흔적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고개에서 고골쪽은 인공의 흔적이 뚜렷했다. 약간의 둔덕을 만들어 옹성구조를흉내내었고, 짧지만 옹로도 만들어 놓았다. (그림의 지역) 골짜기에서 고갯마루로 붙기 위해서는 이 인공둔덕의 좌우에 만든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 한다. 이 곳은 골짜기까지 다 조사를 못했으나 고갯마루의 바로 아랫부분은 인공의 흔적이 뚜렷했다.

Ⅳ. 맺음말
이상과 같이 甕路라고 명명한 새로운 형태의 방어체제를 중심으로 하남지역의 군사적 성격과 방어체제의 일단을 살펴보았다.이러한 옹로는 고골 일대, 즉 金岩山·客山·二聖山·南漢山 등에서 매우 많이 발견되었다. 능선과 계곡이 만나는, 즉 토성의 성문 자리에는 옹성의 형태가 뚜렷했고, 골짜기 아래에서 능선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길에도 옹로가 발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능선길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옹로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산전체의 중요한 지점에는 옹로와 변형옹로들을 만들어 방어망을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구축해놓았다.옹로는 인공적으로 삭토와 성토를 해가면서 길을 일직선이 아니라 심한 S자형의 커브길, 즉 뱀이 꿈틀꿈틀 거리는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공격군에게는 매우 불리한 지형이 되고, 지형을 잘 아는 방어군들에게는 매우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적을 교란시키면서 공격할 수 있는 효율적인 체제이다. '暗路'라고 명명한 옹로형의 방어체제도 있다.
이러한 옹로체제는 필자가 그 동안의 조사를 통해서 강변은 물론 일부의 산성에서도 발견하였다. 해안방어체제의 산성에서도 발견하였다. 그리고 南陽灣의 해안방어체제를 조사하던 중 바로 바다와 연접한 해안가에서 매우 완벽하고 정교한 형태의 옹로구조, 즉 해안 참호와 교통호들을 발견하였다.이 글에서는 자료집이란 성격상 새로운 방어체제를 간단히 소개하는 수준에서 끝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심도깊은 연구가 충분하게 이루어진다면 수도나 왕성 등 중요한 지역을 방어하는 방어체제의 전형적인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델을 중요한 몇몇 지역에 적용한다면 고대역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할 것이다. 이 외에도 하남지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다수의 방어시설들이 곳곳에 있다. 이러한 군사적인 성격은 하남지역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음을 반증하고 있다.(위 본문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 특히 하남지역의 방어체제는 필자와 한종섭씨 등 백제문화연구회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밝힌 것임을 알려둔다.
이 글에 실린 스케치자료는 이호디자인의 이선호씨가, 사진자료는 사진작가인 전성영씨가 제공하였으며, 측량도는 탐험문화연구소가 제공하였다. 오랜 기간동안 필자와 함께 현장을 조사하면서 훌륭한 자료들을 작성하였다. 감사드린다.)


 
 
 
 
      황하문명 대탐사단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