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성 >


공산성은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으로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이 죽고 한강유역을 빼았기자 문주왕 원년(475) 이곳 웅진으로 천도한 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시대의 도성이었으며 그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성의 북쪽에는 금강이 흐르고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길이는 2,660m이며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으로 원래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대부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내 유적은 임류각, 추정왕궁지, 연지,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공북루, 진남루, 동문루, 금서루, 영은사, 광북루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  

< 추정왕궁지 >

백제시대의 추정왕궁지 유적이 위치한 곳은 쌍수정 광장이라 불리웠던 지역으로 해발 85m에 면적은 6,800㎡이며 1985년부터 2년간에 걸쳐 발굴 조사한 결과 백제 건물지와 연지 등 많은 유적이 확인되었다.

 

< 백제시대의 연지 >


만하루 앞에 있는 백제시대의 연못지로 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내려가면서 계단식으로 좁아지면서 단을 둔 석축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서양측에 넓은 통로를 둔 것이 특징이고 깊이는 약 9m이다. 이곳의 물은 수구를 통하여 금강으로 나가게 설계되어 있는데 그 형태가 이성산성의 방형연못지와 매우 흡사하다.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 22년(500년) 왕궁의 동쪽에 만든 건축물로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980년에 공산성에서 발굴조사된 추정임류각지의 구조를 근거로 1991~1993년까지 새로 복원한 것이다.  

< 송산리 고분군 >

공산성의 서쪽에 자리잡은 송산의 남쪽 경사면에 있는 백제시대 고분군으로 웅진에 자리잡은 475년부터 538년 사비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지금의 공주인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의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동쪽으로 수려한 공산성이 건너다 보이고, 서쪽으로 곰나루의 금강이 아늑하게 감싸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충남의 명산 계룡산이 눈앞에 펼쳐져 풍광이 뛰어난 이곳은 가히 명당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당시에 이미 사신사상에 따라 묘지를 선택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에서 밝혀진 이 고분들의 내부 구조는 크게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의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북방 상부에 동서 1열로 늘어서 있는 4기의 고분과 남방 하부에 위치한 3기의 고분중 동남쪽의 한 고분(5호분)은 널방인 현실과 현실로 들어가는 길인 연도를 네모꼴로 다듬은 돌로 축조한 돌방무덤이고, 남방 하부의 나머지 두 고분 즉 무령왕릉과 송산리6호분은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이다.
 

< 무녕왕능 >




1971년에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하게 발견되어 발굴 조사된 무녕왕릉은 송산리 6호분과 같이 벽돌로 축조한 터널형 전축분으로 직사각형 현실의 남쪽 가운데에 현실로 들어가는 짧은 연도가 달렸다. 연꽃무늬, 인동무늬, 마름모꼴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를 아름답게 새긴 벽돌을 각기 그 쓰일 위치에 알맞게 갖가지로 만들어 길이모 쌓기와 작은모 쌓기로 반복하면서 쌓은 현실의 벽 5곳에는 등잔을 놓았던 높이 24㎝의 보주형 등감이 있고, 등감 아래에는 창을 배치하였다. 현실의 크기는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가 2.72m, 바닥면에서 터널형을 이룬 천정까지의 높이는 2.93m이다. 발굴 당시 왕과 왕비의 시신을 안치했던 목관이 현실 바닥에 동서로 놓여 있었고, 현실 내부와 연도에서는 금제관식, 팔찌를 비롯한 각종 금은제 장신구와 무기류, 도자기 등 108종 2,906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점에 이른다. 능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그 왕비였으며, 축조 연대를 명확히 알려주었던 2장의 석판으로 된 묘지(지석)는 연도 입구 가까이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삼국시대의 왕릉 중에서 묘지석이 유일하게 되어 최초로 주인공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으로그안에서 나온 많은 유물들은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금제관식><금귀걸이>


<금제뒤꽂이> <석수>

< 무녕왕의 묘지석 >

무녕왕은 개로왕 8년(462)에 태어난 백제 25대 무령왕은 40세 되던 해인 501년 왕위에 올라 재위 23년 만인 523년 세상을 떠났다. 무령왕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활발한 외교정책을 통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한 방어망을 견고히 함으로써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왕릉 안으로 들어가는 널길 오른쪽에 있던 왕의 지석 표면에는 "무령왕이 62세 되던 523년 5월 7일 붕어(崩御)하여 525년 8월 12일에 대묘[大墓·王陵]에 모시고 지상과 같이 기록하여 둔다." 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방위표(方位表) 또는 능(陵)의 위치를 표시하는 묘역도(墓域圖)를 나타내 10간(干) 12지(支)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영동 대장군은 무령왕 21년(510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양 고조(高祖)로부터 받은 작호인데, 당시 양나라의 제2품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다. 사마는 삼국사기의 사마(斯摩)·륭(隆), 일본 서기의 사마와 같은 무령왕의 이름이다. 그런데 무령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천자(天子)나 황제의 죽음에만 사용하는 가장 격이 높은 붕(崩)자를 사용하고 있어 백제 왕으로서의 주체성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무령왕이 붕어한 때(523년 5월)에서부터 장례(525년 8월)를 치르기까지의 27개월 5일 동안 은 빈(殯)의 상태로 있다가 12일을 택해서 왕릉에 장사 지낸 것으로 되어 있어 백제의 장례 풍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