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소산성 >


백제 왕도 중심의 산성으로 북쪽으로 백마강에 연하여 있는 표고 106m의 부소산에 2.2km의 판축으로 된 토성이 축성되어 있다. 성내에는 낙화암, 군창지, 영일루, 사비루, 백화정, 고란사, 삼충사, 대왕포, 조룡대, 소복사지, 궁녀사 등 많은 유적이 있다.
 

< 추정왕궁터 >

부소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추정왕궁터로 현재 담장과 연못지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백제의 왕은 부소산성의 남쪽인 이곳에 평상시에 살다가 유사시에는 부소산성으로 피난해 들어갔던 것이다.

 

< 낙화암 >


부소산 북쪽 백마강에 연한 높이 약 40m의 절벽이 낙화암이다. 660년 7월 13일,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수많은 궁녀와 사비성의 아낙네들이 적에게 쫓기다 이 바위 위에서 백마강에 떨어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군창지>

부소산성의 동편에 자리잡은 창고 터로 현재에도 건물의 초석이 남아있고 불에탄 곡식들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부소산성이 왕궁의 북쪽에 자리잡은 산성으로 유사시에 이산성으로 피난하여 항쟁하였던 곳으로 유사시를 대비하여 이곳에 군량미를 비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 고란사 >

낙화암이 있는 백화정 아래에 백마강가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로 이곳에는 고란초라는 약초가 자라고 있는데 이곳의 약수를 왕에게 바칠 때 고란초를 띄워서 드렸다고 한다.  

< 궁남지 >




사비시대 궁의 남쪽에 있던 연못으로 그옆에는 왕의 이궁지가 있었는데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였는데 이 연못의 용과 교접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다.
 


< 능산리고분군 >

 

부여에서 논산 가는 길로 동으로 나가면 3군의 구분 16기가 있는데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7기의 고분이다. 이 고분은 사비 시대 백제 왕릉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 발굴 조사 되었는데, 관못, 금종 등이 수습되었고 현재 공개되어 있다. 석실에 사용한 동은 편마암으로 판석을 물갈기를 해서 각각 한 장으로 천장과 벽면을 구성하였다. 천장에는 흐르는 구름을 그리고 연꽃을 그려 극락정토를 상징하였다.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 남벽에는 주작을 그렸다. 지금 천장의 연꽃과 서벽의 백호가 희미하게 보인다. 현실의 크기는 평면이 3.25m X 1.94m이고, 높이는 1,94m이다. 고분에 사신도가 그려지는 것은 고루려 벽화 고분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도교 사상에서 오는 사방 신으로 묘실에 모신 시신을 지켜 주는 보호신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능산리 고분군의 경역내에 백제 고분의 여러 모형을 전시할 전시관이 조성되고 있다.  

< 창왕명석조사리감 >

부여의 능산리고분군 좌측의 능산리사지 목탑(木塔)터 중심에 있는 심초석 상면(上面)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사리감은 심초석의 가장자리에서 동쪽으로 약 45˚ 뉘어져 있었다. 화강암으로 제작된 사리감은 윗면의 좌우단을 둥글게 깍은 직육변형으로서 그 전체적인 외형이 마치 오늘날의 우체통처럼 보인다. 크기는 높이 74cm, 가로와 너비는 각각 50cm이다. 사리감은 앞 뒷면에 龕室이 마련되어 있는데, 뒤쪽은 높이 45cm, 깊이 25cm, 깊이 10cm 이지만 파다 만 형태이며 앞쪽의 사리공은 높이 45cm, 너비 25.5cm, 깊이 25.5cm이다. 감실의 뚜껑을 씌웠던 것으로 보이는 틀(4cm)을 제외하면 실제 사리장엄을 넣을 수 있는 깊이는 약 21.5cm에 해당된다. 조사 당시부터 이 감실의 내부에서는 전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사리기를 넣었던 전면 감실의 좌우 면에는 각각 10자씩의 명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刻字하였는데,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를 따르고 있으며 공주 무녕왕능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卷)의 글씨와 흡사하여 주목된다. 기록된 명문은 '백제 창왕 13년 정해에 여동생인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 丁亥妹兄 公主供養舍利)'는 내용이다. 이는 성왕의 위엄을 기려 만든 것으로 백제 창왕은 성왕(聖王)의 아들로서 554년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그 13년은 567년에 해당되며 이 때 심초석의 舍利 공양과 함께 목탑(木塔)의 건립이 시작되었음을 밝혀지게 되었다. 이처럼 이 화강석제 사리감은 삼국시대 유물로서는 처음으로 사리 공양자와 그 연대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 나라 최초로 목탑의 심초석(心礎石)과 심주(心柱) 등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며 백제 시대의 사리장엄과 진단구의 의미가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아울러 능산리사지의 초창년대가 567년경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금동용봉대향로 >

 

부여의 능산리고분군 좌측의 능산리사지 목탑(木塔)터 중심에 있는 심초석 상면(上面)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사리감은 심초석의 가장자리에서 동쪽으로 약 45˚ 뉘어져 있었다. 화강암으로 제작된 사리감은 윗면의 좌우단을 둥글게 깍은 직육변형으로서 그 전체적인 외형이 마치 오늘날의 우체통처럼 보인다. 크기는 높이 74cm, 가로와 너비는 각각 50cm이다. 사리감은 앞 뒷면에 龕室이 마련되어 있는데, 뒤쪽은 높이 45cm, 깊이 25cm, 깊이 10cm 이지만 파다 만 형태이며 앞쪽의 사리공은 높이 45cm, 너비 25.5cm, 깊이 25.5cm이다. 감실의 뚜껑을 씌웠던 것으로 보이는 틀(4cm)을 제외하면 실제 사리장엄을 넣을 수 있는 깊이는 약 21.5cm에 해당된다. 조사 당시부터 이 감실의 내부에서는 전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사리기를 넣었던 전면 감실의 좌우 면에는 각각 10자씩의 명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刻字하였는데,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를 따르고 있으며 공주 무녕왕능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卷)의 글씨와 흡사하여 주목된다. 기록된 명문은 '백제 창왕 13년 정해에 여동생인 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 丁亥妹兄 公主供養舍利)'는 내용이다. 이는 성왕의 위엄을 기려 만든 것으로 백제 창왕은 성왕(聖王)의 아들로서 554년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그 13년은 567년에 해당되며 이 때 심초석의 舍利 공양과 함께 목탑(木塔)의 건립이 시작되었음을 밝혀지게 되었다. 이처럼 이 화강석제 사리감은 삼국시대 유물로서는 처음으로 사리 공양자와 그 연대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 나라 최초로 목탑의 심초석(心礎石)과 심주(心柱) 등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며 백제 시대의 사리장엄과 진단구의 의미가 새롭게 밝혀지게 되었다. 아울러 능산리사지의 초창년대가 567년경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부여읍 동남리의 정림사지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오층석탑. 국보 제9호. 높이 833㎝. 백제를 멸망시킨 당(唐)나라의 소정방이 ‘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새겨놓았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면서 끝이 약간 반전되어 있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얕게 표현되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시대뿐 아니라 삼국시대 석탑 연구의 귀중한 예이다. 목조건물의 짜임새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특히 이탑은 백제시대의 정형성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시대의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잇다.  

< 사택지적비 >


이 석비는 글자를 새기기 쉬운 양질의 화강암 한면을 편평하게 잘 다듬어서 가로·세로의 정간(井間)을 나누어서 그안에 한글자씩 비문을 음각했는데 각행이 세로로 14자씩의 명문이며 현재는 4행만이 남아있다. 정간은 정방형으로 한변이 7cm이다. 이러한 정간내에 문자 투입식(投入式)은 삼국시대 고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이다. 사택지적비는 오른쪽 상부에 있는 직경 2cm의 원내에 봉황문을 음각하고 원주선내에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이수에 번용을 조각하기전 봉황을 조식한 중국의 형식을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는 사택지적비가 새로운 형태의 석비라 하겠다. 현존하는 비문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내지성(奈祗城)의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몸이 날과 달로 늙어감을 한탄하여 금으로 불당과 옥으로 탑파를 만들어 세우니 그 건조물의 위관이 장엄하다."는 뜻이라 하겠다. 비문에서 지적한 '내지성'은 부여읍 사삼십리의 은산면 내지리로 추측되며 '사택지적'은 이곳의 성주가 아니었던가 한다. 초행에 '甲寅年正月九日'이라고 간지로 연호를 대신하였고, 사택지적은 『일본서기』권제24 황극천황, 임인년 칠월조에 '백제의 대좌평 사택지적 등이 사신으로 오자 접대하였다(饗百濟使人大佐平智積等於朝)'라는 기록을 참조하면 백제 의자왕 14년(A.D 654) 건립으로 추정된다. 이 석비는 비록 단석이나 당시의 문체와 서법 및 비문의 양식, 여기에 나오는 인물, 특히 堂塔을 奉安한다는 불교미술적인 면등 백제사 연구의 귀중한 금석문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중국 육조시대의 사육변려체된 동시에 자체도 웅건한 구양순체(毆陽詢體)이며 동시대의 신라 금석문과 비교해보면 백제문화의 발달상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