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연구회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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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대의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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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고분>


백제 금성분(金星墳) 연구 (일명 : 전방후원분)


<사단법인> 백제문화 연구회


회장 한 종 섭 글

3) 태양 주위를 운행하는 호국의 별 금성


조선조 세종때(1419~1450) 세종의 명에 의하여 이순지(李純之) 박사 가 편찬한『천문류초:天文類抄』에는“해는 임금의 상이라”하며 “태백 성(금성)은 군대의 상이니 나아가고 물러남으로서 군대의 조짐을 보인 다”

(『천문류초』317쪽, 339쪽 김수길,윤상철 공역 대유학당) 태양을 왕으로 금성을 군사의 별로 본 것은 역사시대 이전부터 태양과 금성에 관련된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천문사상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태백성(금성)을 측정한 기록으로는 초고 왕 40년(서기 205년)으로서 “7월에 태백성이 달을 범했다”는 것을 기 록할 만큼 사건으로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천문류초』에는 금성이 달에 들어가면 휘하 병사에 의하여 임금이 죽는다는 내용등이 있다.(위책340쪽)

금성 운행 괘적의 형태와 태양 주위를 맴도는 특성에서 나라는 태양과 같다는 고대의 이념에서 금성은 호국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하여 이를 적용하게 된 것이다.

* 금성이 이동하는 궤적의 5가지 유형

금성의 5가지 운행 중에서 8의 숫자 모양과 유사하게 운행을 하고 있 는 형태가 있으며 금성 운행의 한주기가 8년이기에 이를 아라비아 숫 자 8로 표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자의 “八”자도 5가지 운행중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고대는 하늘과 관련된 것을 숫자로 표시한 문자 의 시원이 발견되고 있다.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팔자가 사납다 하는 말의 어원도 인생살이가 금성의 운행처럼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고 8자 모양 회전을 하기 에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또 하나의 예로서 “7”의 숫자 형태는 북두칠성 별의 배치와 같은 모 양의 글자에서도 별과 관련된 숫자임을 알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8 이라는 뜻은 금성을 의미하면서 호국이라는 깊은 의 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것을 알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은 유적과 기록에서 그 뜻을 알수 있다.

(1) 호국용이 살고 있었다는 삼국유사의 분황사 8각 우물
삼국시대 8각 우물로서는 황룡사의 8각 우물과 백제시대 왕족들이 사용하였던 부여 구룡면 용당리 만가대(萬家垈)의 8각 우물, 부여 동남리 전천왕사지(傳天王寺地)에 8각 우물이 있었다는 기록과 부여 쌍북리 8각 우물이 전해지고 있다.

(2) 신라, 고려 시대의 호국적인 행사인 팔관회(八關會)
<삼국사기> 진흥왕12년(551년)

(3) 고구려 초기 호국불교인 8각 목탑

(4) 일본과 이성산성의 원분에 8각이 있는 금성분

(5) 고대 금성과 관련된 것으로 “졸본”이라는 뜻이 키르기스스탄 에 서는 금성을 “촐폰”이라고 하는 내용을 시인 김지하씨의 여행에서 밝혀낸 것이며 신라의 도읍지 금성(金城)도 이러한 뜻이 포함된 것으 로 보여진다.

(6) 일본의 인덕천왕과 응신천왕의 금성분 옆에 “하치반 신사” (팔번신사(八幡神社))가 있다는 것도 금성분과 “8” 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내용임을 알수 있다.

4) 백제의 천문학과 일본의 금성분(전방후원분)

금성분의 형태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며 기하학적인 모양으로서 쉽게 응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문화의 바탕에서 이루워진 것으로 왜국 현지에서 쉽게 나타날 수 있는 묘제는 아닌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왜국의 고대 문화는 백제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천문에서 문자에 이르기까지 한성 백제시대에 문화를 왜국으로 전수하였기 때문이다. 금성분은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으면 적용될 수 없으며 무덤에 까지 적용하게 된 과정은 처음에 금성과 관련된 다른 분야에서부터 서서히 접목되어 오다가 어느 정도 폭 넓게 사용된 후에 많은 사람의 인식에서 보수성이 강한 무덤에 까지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채택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떤 관습이나 행동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기 까지는 쉽게 적용 될수 있는 부분에서부터 시작하며 시험적이고 점차적으로 시행되어 오다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후에 보수성이 강한 구조물에 까지 적용되는 것이 생활 풍습이다.

또한 일본학자의 주장을 의심할수 있는 것이 부장품은 백제의 유물로 되어 있는데 외부는 일본 고유의 묘제라는 점에서 겉과 속이 다르다는 부합이 되지 않는 묘제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을 알수 있다.

묘제는 보수성이 강하며 죽은 자에 대한 철학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기하학적인 모양의 묘제는 축적된 고대 철학을 바탕으로 형성 되었기에 쉽게 발생 할수 있는 묘제가 아닌 것으로 2000년도에 금성분에 대한 연구 논문을 저서로 발표한 적이 있다.
왜국에 전방후원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4세기 중엽이라면 백제문화를 받아들여 개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다.

그 당시 왜국은 개화시기로서 일본 고대국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무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한 면이 있다. 그 동안 하남시 유적조사에서 몇기의 전방후원분을 발견하였고 이성산성 다각형 건물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원분이 8각으로 된 전방후원분이 일본에서 10여기 발견된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하남시 이성산성 발굴에서도 원분이 8각으로 조성된 전방후원분이 발굴되었고 황산과 민둥산도 8각의 형태가 남아있어 고분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 우선 고분에 대한 성격을 알고 있어야 적절한 고분의 명칭과 발생된 원인과 내용을 설명 할수 있기에 그동안 조사 연구를 한 결과 전방후원분은 금성(金星)과 관련된 고분임을 알게되어 이러한 유적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