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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국(貊國) 왕도 유적 조사에 대하여

                                                    <사>백제 문화 연구회

                                                                        회 장 한종섭

4. 춘천 발산리 건물지를 맥국 왕궁지로 보는 이유.

고대의 왕도는 많은 사람들이 세력집단의 체재를 유지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공통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과 입지의 기준이 있다. 필수적인 구비요건이 충족 되지 않는 다면 세력을 형성하고 유지 하면서 오랫동안 살아 갈수가 없다.

특히 맥국과 같이 장기간 존재 하였던 국가는 이에 걸 맞는 많은 시설을 조성 하였을 것이며 그러한 도시 구조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만이 왕도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필품 수급이 원활해야 하며 힘의 근원인 경제적인 풍요와 함께 외침에 대비하는 방위 시설이 구비 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왕도는 복합적인 구조로 조성되어 있어 일반적인 구조의 단일성과는 달리 다음과 같은 구조에서 왕도임이 밝혀지고 있다.

1) 고대의 왕도는 강과 하천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대의 왕도는 강이나 하천 주변에 왕도를 정하는 것은 생필품의 물자 운반과 교통 또는 적의 침입을 막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땔감이나 소금 생필품을 지속적으로 원활하게 수급 운반 할 수 있는 수상 교통이 편리한 곳을 선택한다.

지금까지 20곳에 달하는 고대의 왕도는 모두 조사한 결과 강과 하천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위례성 백제사 2권』147쪽]

맥국 : 소양강과 북한강으로 에워 쌓여 자연 해자(垓字)를 이루고 한계의 하천과 또 다른 하천이 도성 안으로 연결 되어 운하로 조성하기에 알맞은 입지의 좋은 위치에 속한다.

2) 왕도는 단일성이 아닌 복합적인 구조이다.

왕도는 일반적인 성곽의 구조와 다르며 거대한 도성을 조성한 만큼 수많은 격실 단위의 보호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맥국 : 발산리는 왕궁지를 중심으로 앞에는 넓은 벌판이 있어 백성들이 도시를 이루고 살아 갈수 있는 공간이 있고 주변 계곡마다 백성들이 에워싸고 살수 있는 공간과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3) 배후에 거대한 진산(鎭山)의 보호막이 조성되어 있다.

왕도 주변에는 대부분 거대한 산들과 연결된 지형으로 수호적인 진산이 있다. 맥국 : 수리봉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험준한 산들이 겹겹이 천혜의 요새를 이루어 북쪽에서 넘어 올수 없는 절벽을 이루고 있는 지형이다. 거대한 산들이 수리봉을 감싸고 또한 수리봉은 진산(鎭山)의 역할로서 왕도를 보호하는 지형의 산이다.

4) 유사시를 대비한 도성과 산성이 연계되어 있어야 한다.
왕궁지 주변에는 유사시에 대피 할 수 있는 산성이 있어야 만이 왕도가 될 수 있다. 만약 퇴로가 조성되어 있지 않으면 왕도는 항전 보호 될 수 없기에 위험한 입지로서 안전성이 있는 도읍지가 될 수 없다.

맥국 : 수리봉에서 산성이 발견되었으며 그 구조가 뛰어난 방어성으로서 왕궁지와 연결이 되어 있다.
왕궁지와 연결된 거대한 피난성이 수리봉에서 발견 되므로 서 왕도임이 입증 되고 성의 구조는 계곡을 여러 층의 계단식 석벽성(石壁城: 암반을 돌출 시켜 조성한 성벽)이 조성되어 있다.

5) 왕도로 향하는 길목에는 군사 시설이 포진되어 있다.
맥국 : 우두산의 산줄기는 대표적인 도성방어 시설로서 소양강을 차단하는 강변 성이며 아침못 동쪽의 야산과 남쪽의 들판에도 옛 지명으로 지둔지, 둔지, 윗문정, 아랫문정 과 같은 땅이름은 고대 도성이 있었던 흔적의 땅이름이 남아 있었다. 왕궁지는 여러 겹으로 보호막을 조성한 장성이 있고 보호를 철저히 할 수 있는 시설의 중심 위치에 있고 왕도에만 있는 나성의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6) 주변 가까운 곳에 넓은 평야 지대가 있어야 한다.
넓은 평야는 병마의 목장과 군사 훈련장 또는 농경에 적합한 위치등 용도가 많은 만큼 이러한 평야지대가 넓으면 넓을수록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기에 입지 선택에서 빼 놓을 수 없다.

맥국 : 남쪽으로 넓은 평야가 있어 백성들의 거주와 함께 군사 훈련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적합한 위치의 넓은 들판이 있다.

7) 땔감의 공급이 원활한 곳인가의 입지를 살펴본다.
우리나라는 추운 겨울철을 대비하기 위하여 많은 땔감을 운반 비축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가 없기에 땔감 수급은 필수적이고 그 수요도 엄청난 것이다. 생필품인 땔감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도시를 이루고 살아 갈수가 없다.

맥국 : 거대한 산들이 강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땔감은 그 어느 곳보다 풍부하고 운반 공급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8) 연계된 세력권의 유적과 유물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
왕도유적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그 당시나 전후의 유적이 밀집되어 있어야 한다.

맥국 : 춘천은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산재되어 있고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의 밀집도가 높다. 또한 우두산 끝에 사찰지가 발견이 되었고 이러한 위치는 강으로 오르내리는 감시 역할과 같은 호국 사찰과 같은 위치로 보여 졌다. 즉 왕도 입구를 지키는 사찰로서 한성 백제 시대의 강동구 암사동 암사(岩寺) 절터와 공주 공산성의 영은사(靈隱寺), 부여의 고란사 등이 도성 앞강을 감시하는 사찰에 속한다.

9) 각종 문헌과 땅이름 등 관련 자료의 조사 검토
수백년동안 왕도로 정하였던 위치라면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땅이름과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는 내용을 면밀하게 조사 하여 참고 한다.

맥국 : 발산, 샘밭, 새밑, 아침, 한계, 수리봉, 삼한골,
위와 같은 지명은 고대 왕도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유사성이 있는 땅이름 들이다.
18세기 중엽과 이후의 고지도인 광여도, 해동지도, 여지도에는 고맥도(古貊都)로 표기 되어 있고 조선지도에는 고맥성(古貊城)으로 발산리 지역에 표기되어 있다.

오래전부터 발산리 일대를 왕도로 보았고 그 위치를 왕대로 보았으며 정밀 조사 결과 위치적으로 근접 하였으나 왕도의 구조에서 노출된 들판에는 왕궁의 입지로서는 부적합한 지형이며 보호되기 좋은 곳을 정밀 조사 하게 되었다. 왕대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이상 떨어진 산 능선 계곡위에서 와편이 퇴적된 건물지가 발견되어 면밀하게 조사를 하게 된 것이다.

10) 왕궁은 독립된 위치에 물의 공급이 원활한 입지를 선택 한다.
왕궁은 물의 공급이 원활해야 하며 왕궁과 연계된 산성은 흐르는 물이 있거나 이를 저장하는 저수지를 마련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백성들이 사는 곳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독립 보호될 수 있는 위치에 왕궁지를 선택하게 된다.

맥국 : 왕궁 주변에는 항시 흐르는 계곡의 물이 있으며 수리봉 산성은 폭포처럼 흐르는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다.
왕궁은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은밀한 장소를 선택 하였고 독립되어 있다.
건물지 주변은 위치적으로 길목을 지키거나 진성이 있을 곳이 아닌 독립된 위치로서 건물지를 보호하는 군사 시설이 치밀하게 조성되어 있다.

11) 고대의 왕은 지상의 신이며 왕궁은 신전(神殿)이기에 주변 구조가 신이 사는 곳으로 조성되어 있다.
고대의 왕은 지상의 신(神)으로 추앙을 받았던 만큼 왕궁은 신전(神殿)으로서 구조면에서 자연 숭배의 사상으로 조성 하였다.

맥국 : 고대의 왕도 주변에 흐르는 강이나 하천의 이름으로는 은하수를 지칭하였던 “한(漢)”이라는 하천과 강 이름에서 인근에는 “한계”라는 하천 이름이 남아 있으며 왕궁의 건물지도 해가 뜨고 지는 방향의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장방형으로 보편적인 왕궁의 구조와 동일하다. ( 남북 약 80m 동서 약 150m) 이러한 것 이외 고대 사상이 포함된 도시 구조이며 마한의 왕궁지와 규모가 거의 같다

12) 방어 시설이 치밀하게 조성된 왕궁지 .
왕궁은 그 어느 곳보다 중요시 하는 건물로서 건물지는 접근이 어렵도록 높은 단으로 조성되어 있고 주변 보호 시설이 잘되어 있다.

맥국 : 왕궁지는 계곡의 언덕을 이용하여 7?8m의 높은 곳에 조성되어 있으며 남쪽과 서쪽은 토성으로 조성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발산리 왕궁지 건물지를 중심으로 여러 겹의 토성이 조성된 것으로 조사되어 보호 시설에 뛰어난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왕궁 건물을 지키는 동쪽 계곡에는 2개의 군사시설인 치(雉) 가 궁궐지에 붙어 있어 건물지 수비를 얼마나 철저히 하였는가를 알게 하는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이곳은 길목도 아니며 또한 성도 아닌 외진 곳에 거대한 건물지를 지키는 치(雉)와 같은 군사 시설이 있는 건물지라면 이는 일반적인 건물지가 아닌 왕궁임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13) 왕궁과 주변 보호 시설은 모두 토성으로 조성되어 있다.
고구려, 백제, 마한 모든 왕궁은 토성이 석성보다 견고하기에 토성으로 왕궁을 조성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고구려의 안학궁을 발굴한 결과 왕궁주위를 토성으로 견고하게 조성한 것이 발견이 되었고 백제의 왕궁지 하남시 교산동의 건물지도 토성으로 조성한 것이 발굴이 되었다.(『위례성 백제사 2권』 전면 화보편). 왕궁 축성에 돌이 없어 토성을 쌓았던 것은 아니며 석성은 일시에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전한 면이 있어 왕궁은 토성을 견고하게 쌓은 것이 발견되고 있다.

맥국 : 왕궁지를 지키는 2기의 치(雉)와 주변은 모두 토석 혼축으로 조성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보다 견고한 성은 토성이라는 것이 여러 왕궁지 발굴에서 입증이 되고 있으며 맥국의 왕궁지 주변도 토성으로 조성한 것이 밝혀지고 있다.

14) 토목공사의 공력도 와 기와 편이 발견 되고 있는 건물지.
왕궁 주변을 인위적으로 조성한 흔적이 많고 건물지의 흔적과 기와편이 발견되어야 왕궁의 위치가 증명이 되는 것이다.

맥국 : 주변 야산을 조사해 보면 인위적으로 쌓거나 손질한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수리봉 산성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인위적인 공사를 진행한 것으로 대단위 공사를 한 것이 곳곳마다 발견이 되고 있다. 특히 건물지는 보호 시설을 하기위하여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는 것이 천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있다는 점에서 내용을 가늠 할 수 있다.

발산리 건물지에서 단편적이지만 삼국시대의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고대의 기와는 왕궁, 신전 또는 사찰, 관부에만 사용된 것으로 이곳 건물의 입지에서 사찰과 관련된 구조가 아닌 것은 군사적인 시설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관부에 속하거나, 교통로, 또는 마을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된 위치로서 왕궁 이외는 고대 기와집이 들어 설수 없는 곳이다. 또한 고대의 건물은 규모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고대 왕궁의 규모와 동일하므로 왕궁임이 밝혀지고 있다.

5. 맥국의 수리봉 산성

석벽성(石壁城)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은 구조나 이름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성으로 석벽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맥국 왕도의 산성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성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석성과 토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지금까지의 구분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못하였지만 성(城)중에서 제일 견고한 성은 석벽성이다.

석벽성의 구조는 산을 깎아서 내부에 있는 암반이 나올때 까지 파내어 절벽이 되도록 조성한 견고한 성으로 석성, 토성과 달리 석벽의 암반성이다. 이러한 구조의 성을 볼려면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의 난곡과 시흥시 경계의 호암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2.3km 정도의 장성으로 조성된 백제 시대의 석벽성이 남아 있다.

백제 시대 짧은 석벽성은 여러곳에서 확인이 되고 있으나 이렇게 긴 장성은 드물다. 이러한 석벽성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는 백제와 신라, 가야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전북 무주군 지역에 적상산성을 비롯한 밝혀지지 않은 거대한 석벽성들이 많이 조성된 것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 산성이라면 대부분 태뫼식이나 포곡형의 산성을 생각 하게 되나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성 보다 더 다양한 구조의 성이 발견되고 있기에 석벽성과 같은 여러 가지 구조의 성을 알게 된 것이다. 수리봉 석벽성은 계곡의 암반을 계단식으로 조성하여 적이 올라 올 수 없도록 한 다층식(多層式) 석벽성의 구조로 되어 있어 험준함이 이를데 없다.

지금까지 이러한 구조의 성에 대한 실체에 대하여 알 수 없어 성곽에 대한 학술에 포함 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현존하는 성의 구조보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방식으로 축조된 성들이 숫자적으로 더 많고 구조면에서도 여러 가지 양식의 성이 발견되고 있다. 수리봉 산성은 특이한 산성 구조이며 성내부에는 갈수기에도 수량이 풍부한 폭포가 있고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계단식으로 여러 층의 석벽성을 조성한 것으로 온 산을 인위적으로 암반을 절석하여 조성하였다.
방대한 토목 공사를 하여 산 전채를 요새화한 왕도 배후성이며 다층적이고 험난한 지형에 조성한 성의 구조이다. 성내부에는 수많은 유적이 포함되어 있어 그 당시의 전쟁 양상을 알 수 있기에 앞으로 면밀한 연구 조사의 학술 과제가 되고 있다.

수리봉 북쪽으로는 워낙 험준한 산세이기에 적의 침입이 어렵게 되어 있는 구조이다. 대단위 석벽성으로 산 전채를 절석하여 동양의 마츠픽츠라 할 만큼 특이한 성의 구조로 조성한 것이 삼국과 달리 맥국만의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6. 맥국 유적에서 본 유의 점

지금까지 맥국 왕도와 관련된 자료는 단시일에 겨우 왕도 확인을 위한 조사 연구이며 장기간 정밀 조사를 한다면 수많은 문화 자원을 찾아 낼 수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또한 맥국과 관련된 유적의 판단이나 조사에서 다른 지역과 달리 유의해야 할 점이 나타나고 있다. 춘천의 지형과 토질에서 나타나는 고대 유적의 현상을 이해하지 않으면 판단의 어려움과 오판 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유물과 토질의 현상
유적 주변의 토질은 풍화된 사질토로서 표면 유실이 심하여 유물이 남아 있지 못하는 지표 교란이 심한 사질의 토질이다. 접착성이 약한 풍화 사질토의 지질에는 고대의 유물이 대부분 유실되기 때문에 깊게 묻힌 유물 이외는 표면에 잘남아 있지 않기에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판독에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오랜 경작지로 사용 되었다면 더욱 조사가 어려운 것으로 그나마 확인 할 수 있는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는 점에서 다행으로 간신히 찾아 낼 수 있는 왕궁 건물지 였다.
건물지의 상태는 천 수 백년간 오랜 세월 경작지로 이용된 관계로 변화 과정은 유실된 면적이 많고 시설은 흔적조차 소멸되었다.

2) 발굴과 유물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은 발굴에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으면 부정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기 쉽다. 또한 발굴에서 한 시대 것만 나오면 그 시대의 것으로만 치우쳐 단정을 짓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것이 발굴의 함정으로서 유물과 유적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유동성이 심한 것이 발굴의 자료이다.

특히 춘천과 같은 토질과 경사진 위치는 더욱 유물이 남아 있지 않는 현상으로 유물 채집에는 어려움이 많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에는 오히려 완전한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는 번화가에 어떤 물건이 있다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으며 경작을 하기 좋은 곳은 더욱 훼손이 심하다.

풍납토성과 같이 많은 완품의 유물이 발굴 된다는 것은 침수로 인하여 매몰되지 않으면 완품의 유물이 남아 있을 수 없고 왕도와 같이 사람이 살기 좋은 곳에는 유물보다 왕도와 관련된 도시 구조의 유적이 밝혀져야 한다. 땅속의 고분이 아니면 온전하게 유적이나 유물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발굴은 부분적인 것을 확인하는 단편적인 면이 있으며 거대한 왕도를 규명하는 것은 폭 넓은 안목에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발굴의 함정으로는 유적이 소멸되어 확인이 되지 않고 발굴자의 학설과 틀리면 부정을 하거나 또한 오판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발굴은 전채적인 연계성 연구를 하지 못하는 단점에서 부분적인 것만 부각이 되므로 많은 오류를 초래 할 수 있다. 고대 도시를 찾아내는 20여 가지의 항목 중에 일부에 속하는 것이 발굴로서 유동성이 심하기에 이를 전부로 생각하는 편견이 되어서는 안된다.

왕도를 규명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유적과 달리 복합적인 전채의 유기적인 연계성과 도시 구조에서 밝혀지기 때문에 폭 넓은 학술조사 에서 일반성과 왕도가 구분이 된다.
왕도와 일반성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의 단일성을 오랫동안 왕성이라고 주장을 해온 오류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도는 복합적인 도시 구조이며 폭넓은 흔적과 도읍지에서만 나타나는 시설의 규명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다.

왕도를 보호하기 위한 나성(羅城)과 수도권 방위의 성 규모와 배치에서 중심이 발견되고 왕도의 신앙 유적과 도시의 크기와 구조에서 전채의 기능이 밝혀지는 것이다.

< 맺는 말 >

장기간 고대 왕도를 연구한 결과에서 발산리 왕궁지를 찾을 수 있었고 다른 왕도와 비교한 결과에서 보다 확고하게 왕궁지를 입증 하게 된 것이다. 다만 관련 유적과 유물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 많은 역사성을 밝혀줄 것인가 하는 것은 전채를 조사한 후에 나타나는 현상의 연구에서 가늠이 된다.

한 국가의 왕도는 엄청난 함축된 역사 자료가 포함되어 있어 앞으로의 조사 결과에 의하여 많은 것이 밝혀질 것으로 보여 진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고대도시와 관련된 유적을 찾아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며 유적은 한번 훼손되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

최근에는 중장비의 발달로 지형 훼손과 변화가 가속화 되어 파괴가 심하고 또한 왕도 연구에 대한 안목의 인적 자원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삼국 초기는 원삼국 시대라는 부족국가의 개념에서는 아무리 발굴을 하여도 기본 학설의 틀에서는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이유는 맥국이 부족국가라는 학설이 지배해온 것으로 거대한 규모의 왕도 발견은 부족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기존 학설과 반대가 되어 인정을 하지 않을 려고 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맥국은 민족의 주류에 해당하는 큰 뿌리의 역사 유적이기에 이를 밝히고 보존 하는데 소흘이 할 수 없는 사명감과 현황 은 피할 수 없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한번 파괴가 되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기에 특히 왕능과 같은 중요한 유적은 정밀 조사를 해야 할 사안이 되고 있다.

강원도 후미진 산골 외진 곳에 독립된 거대한 건물지에 고대 기와집이 있었다는 것은 왕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조사 연구는 이제 시작단계로서 앞으로 더 많은 유적들이 발견되어야 왕도의 면모가 보다 세밀하게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교통, 통신, 고분, 신앙, 군사 적인 각종 예측되는 여러 시설과 규모를 밝혀내면서 다른 왕도와 비교하면 맥국의 실체가 가늠이 된다. 고대 유적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천수백년 동안 변화가 된 것이 많기에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안목이 넓어진다.

그러나 고대 유적을 찾아내는 일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문헌과 발굴 조사로서는 유적을 찾아낼 수 없다. 지금까지의 발굴은 단편적이기에 현장 학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형의 변화 과정, 지리적인 삶의 여건, 자연과 인위의 구분, 고대의 사상과 군사적인 시설 등 각종 자연과 인위적 현상의 종합적인 연구에서 고대 왕도의 유적을 찾아 낼 수 있기에 왕도 구조의 학문적인 축적이 없으면 조사가 어렵다.

백제 초기 왕도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발굴의 취약성이 입증 되었으며 고대 유적을 찾아내는 것은 종합적인 현장 학문으로서 오랜 세월 발로 뛰면서 연구하지 않으면 어렵다.
특히 많은 유적을 현지에서 직접 비교하면서 연구하는 현장학문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고 또한 왕도의 도시 구조에 대해서 오랜 연구를 하지 않았기에 발굴이 되어도 판독의 단편성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장기간 현장을 발로 뛰면서 배우는 학술조사의 학문은 오랜 기간 답사 연구에서 안목을 키우는 종합적인 학문이며 지금까지 배울 수 없었던 것은 장기간 발로 뛰어야 하는 미개척 현장 학술 분야이기 때문이다.

왕도의 단순한 기본적인 구조를 알지 못하여 지금까지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 같은 단일성을 장기간 백제의 왕도라고 하는 학설이 통할 수 있었 던 것은 왕도 구조의 연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