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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국(貊國) 왕도 유적 조사에 대하여

                                                    <사>백제 문화 연구회

                                                                        회 장 한종섭

2.산악 지대와 고대 국가

춘천 맥국에 대한 것을 알고자 할 때는 산악 지대와 고대 국가의 입지적인 관련성을 알아야 만이 맥국 의 특성을 이해 할 수 있다.
중국에는 한국가가 탄생하면 300년을 넘지 못하고 멸망하는 특징이 있으나 대륙과 연결된 우리나라의 작은 국가가 대부분 500년 넘게 국가를 지탱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나마 전쟁을 끊임없이 하면서 쉽게 멸망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분명히 중국과는 지정학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우리나라는 산과 하천이 많은 국가이기 때문에 쉽게 정복을 하기도 힘들고 또한 일시적으로 침범을 당하였다 하여도 다시 봉기하여 일어날 수 있는 지형에서 지속적인 명맥의 유지가 가능 하였다.
예로서 월남전 참전에서 실감한 것은 미국이 막강한 힘과 현대전의 무기를 갖고서도 정복을 할 수 없었고 그 이전 프랑스도 월남에서 패전한 경험이 있다.

산악 지대와 가시나무 정글이 있기에 쉽게 정복이 되지 않고 되살아날 수 있었다.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면 강한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공격이 어렵고 기습당할 우려에서 완전 정복이 어려운 산악지대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지형도 강과 하천 험준한 산악지대의 지형으로 500년 넘게 유지한 국가가 많았고 그 중에서도 산악지역인 춘천의 토착 세력은 쉽게 정복을 당하거나 와해되지 않은 특수성이 있는 지형에 속한다.

1)맥국과 말갈의 관련성

백제 왕도가 밝혀지면서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알 수 있게 된 것은 삼국 중에서 말갈과 관련된 기록이 제일 많은 국가는 백제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13개소에 기록되어 있고 신라는 22개소 백제는 31개소에 기록이 될 만큼 연관이 많았다는 것과 또한 가까운 곳에 말갈이 있었다는 것을 내용에서 밝혀주고 있다

백제와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한 말갈은 백제, 신라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있다.
말갈과 제일 가까운 백제를 기준으로 말갈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 그 당시 고대 국가의 최소한의 거리는 어느 정도 였던 가를 알게 되면 말갈의 위치가 최소한 어느 정도의 거리 밖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마한과 백제 건국 위치와의 거리는 마한 왕이 백제에게 “동북 일백리” 땅을 내 주었다는 『삼국사기』온조왕 24년(서기 6년) 의 일백리 거리

(2)『삼국유사』72국 편에 “『통전』에 이런 말이 있다. 조선의 유민(遺民)은 모두 70여 나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땅이 사방(四方) 백리(百里) 이다.”

(3)『삼국지』한(韓)전에는 『위략(魏略)』을 인용 한 글에서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조선 준왕(準王)에게 항복을 하였다.
위만이 준왕을 설득하여 조선의 번병(藩屛)이 되겠다고 하므로 백리의 땅을 주어서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1)번은 확인된 거리로서 하남시의 백제 왕도와 안성의 마한의 왕도와의 거리가 일백리 정도라는 것이 입증이 되었으며 (2)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일백리 거리를 두고 나라를 정하였다는 간격을 보편적으로 말하고 있다.
(3)은 고조선에 대한 기록으로서 이후에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고조선을 차지한 시기가 기원전 195?209년 사이로 보는 시기로 위의 기록에서 본다면 모두 맥국과 말갈이 존재하였던 근접한 시대성에서 보편적인 통치거리는 일백리 간격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백리 거리는 같은 세력간의 통치 구분거리로서 적대국과의 거리는 일정하지 않으며 유동성이 있는 간격이다.

다만 일백리 거리가 통치 행정 구역을 별개로 정하는 보편적인 간격임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내용에서 본다면 백제 초기에 가까이 있었던 말갈 세력의 중심은 백제 왕도에서 일 백리 밖에 존재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일백리를 양분하면 50리 밖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가상의 통치 영역의 거리로 예측하게 된다.
그 당시 하나의 소국이 통치 하기에 알맞은 일정 면적이 사방(四方) 일백리 거리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백리라는 거리는 안정된 상황에서 보편적일뿐 정확한 기준은 될 수 없는 거리로서 지형과 세력의 크기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검토해 볼 수 있는 기준은 될 수 있기에 맥국과 백제 왕도와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왕도 하남시에서 마한의 왕도인 안성의 양성면 까지의 직선거리는 마한 왕이 일백리 거리라 하였고 하남시에서 춘천까지의 직선거리도 비슷하다.직선거리에서 본다면 춘천의 맥국과 하남 백제왕도 사이에는 다른 나라가 있을 수 없는 거리로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오랫동안 멸망하지 않고 백제를 공격한 세력 집단은 춘천에 있었던 맥국과 관련된 세력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말갈과 맥국도 동일한 세력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은 많으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 당시 국가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삼국지』위지 동이전 고구려 편에는 “ 고구려는 요동의 천 여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하였다.

『삼국지』는 서기 8년에서 265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가 압록강변 집안(集安)에 도읍을 정하고 있을 때 남쪽에 있었다는 조선은 낙랑국과 대방국을 의미 하며 이와 함께 예맥국 도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서쪽은 근접한 나라가 없는 바다이기에 거론을 하지 않고 생략한 것으로 보여 진다.

백제 초기 북방 세력으로 나타나는 낙랑과 대방국은 고조선 계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자주 침범하는 말갈도 맥국 계열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건국 초기에 낙랑과 말갈의 빈번한 침입에 백제가 한강 이남으로 도읍지를 옮겨야 할 만큼 막강한 세력을 가진 국가였다.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기록내용과 고대 국가의 일백리 통치 간격에서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는 조선(낙랑국, 대방국) 과 예맥(말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낙랑국이 고조선의 후예라는 것이 입증이 되고 있기에 한사군의 낙랑현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

2)맥국과 말갈의 통치 구조 지금까지 맥국과 관련된 기록이 소략하여 실체를 알 수 없었으나 맥국을 말갈과 동일하게 본다면 존속 기간이 상당히 길었던 국가이다.
왜 맥국을 말갈이라는 범칭으로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어떤 관계인가를 알지 못하면 맥국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말갈 관직의 명칭을 살펴보면 국가간의 큰 전투에도 수시로 참여한 말갈로서 추장과 장군이라는 명칭으로 조직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 온조왕 18년(기원전1년), 고이왕25년(256년),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8년 (658년) )

맥국에 대한 기록에는 거수(渠帥)가 지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17년 , 19년 )

말갈이 추장제도로 운영된 점에 대해서 그 당시 삼국에서는 관직이 제도화 되어 있었는데 말갈은 왜 추장 제도를 오랫동안 적용을 하였으며 추장제도와 관료 조직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검토한다면 말갈과 맥국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 있다.
말갈은 추장제도에서 통치되었고 맥국은 거수(渠帥)라는 명칭이 보편화 되어 선진적인 체제가 이루워진 관료 계급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이와 유사한 것이 공존 하였던 파푸아 뉴기니아에서 체험한 예를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 파푸아 뉴기니의 추장제도 에서본 말갈의 추장 1970년도에 파푸아 뉴기니아 고산지대에서 2년간 채류 하는 동안 원시 추장들의 통치 에 대하여 직접 체험한 적이 있어 비교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당시 고산족인 파푸아 뉴기니의 여러 마을을 자주 방문 하여 그들이 집단을 이루고 생활하는 과정을 눈여겨 본 적이 있었다.

철은 물론 토기조차 사용하지 않은 우리 보다 2000년 이상 뒤떨어진 생활을 하는 그 들과의 생활 체험에서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 대하여 생각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 당시 파푸아 뉴기니는 호주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로서 독립은 되지 않았으나 정부가 조직된 상태로서 시가지에는 현대 문명의 제도가 적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산족 들은 옛날 그대로의 생활방식으로 추장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기에 신행정과 전통 자치제도의 2원화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 원인은 높은 산악지대의 고산족은 통신이나 교통이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奧地)에 해당되기에 자치 추장 통치제도를 그대로 유지 할 수밖에 없었다.
체계적인 행정 제도보다 추장 제도로 운영 하는 것이 보다 편리 하고 효율성이 높기 때문에 오랫동안 유지 되어 왔던 것이다. 산악이라는 특수성과 여러 가지 문제점에서 자치적인 추장이 통치하는 것이 보다 안정적인 통치운영이 되었다.

파푸아 뉴기니의 추장 제도가 수천년 동안 유지 되었고 근대 문화가 발달한 그 당시에도 추장 제도로 운영이 되었다는 것은 추장 제도의 장점을 알 수 있는 표본이었다. 추장이 통치하는 제도의 특성을 알게 되면 말갈을 이끌었던 추장 집단을 이해를 할 수 있고 또한 맥국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신행정과 추장제도가 함께 공존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실제 체험한 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파푸아 뉴기니 추장들의 활동 사항을 살펴보면 마을 단위로 선출한 추장이 곳곳마다 있으며 이들이 모든 결정권을 갖고 독자적으로 통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부적인 큰일은 연맹체를 이루고 있는 큰 단위 조직과 연계 협력되어 연맹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어떤 거대한 행사를 할 때는 각 부락의 추장들이 서로 모여 논의하는 협의 연맹체가 구성되어 있었다.

그 당시는 이미 파푸아 뉴기니 라는 국가가 있어 호주(濠洲)로 하여금 위탁 통치를 받고 있었기에 현대 국가의 틀 속에서도 추장 제도를 그대로 사용할 만큼 자치 적인 운영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예로서 그 당시 원주민 이 사고로 인하여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호주 정부에서도 협상의 대표자로서 추장을 인정하였고 사고 해결을 위해서 추장과 보상을 협의하여 문제를 해결 한 실제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추장 제도를 그대로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4) 추장 제도의 지속성

(1) 고산지대가 많은 파푸아 뉴기니
지형적으로 고산지대로서 통신이나 교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부족 단위의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 하고 있었다.
외부와의 접촉을 최대한 억제 하면서 살아 갈수 밖에 없기에 외부 문화의 단절로 교류가 원활하지 못하였다.

(2) 문자의 사용과 언어의 통일이 되어 있지 않았다.
문자의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았고 각 종족사이에 언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행정과 법적인 적용이 어렵고 범죄와 모든 일은 자치내부의 추장에 의해서 처리 할 수밖에 없고 또한 마을 사람들도 전통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획일적인 통치 전달을 할 수가 없기에 지도자인 추장에게 위임하여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 되었다.

(3) 종족간의 배타성이 강하다
얼굴에 부족 표시의 문신을 하여 다른 마을로 쉽게 왕래 할 수 없으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죽음을 당할 수 있을 만큼 통제되어 있었다.
시장이나 한정된 장소에서만 만남이 있으며 타 지역 마을을 방문 할때는 방문지역 추장의 허락이 있어야 만이 출입이 가능할 만큼 배타성이 강하다.
통제를 엄격하게 한 것은 각 부족간의 안전을 위하여 외부인의 출입은 제한적이며 사고를 미연에 방지 하고자 접촉을 최대한 통제해 왔던 고대 부족간의 엄격한 배타성이 있었다.

(4) 추장 통치와 연맹 제도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에서 중앙의 직접적인 행정 통치를 수행하기 어렵고 작은 규모의 단위 조직에는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이 되었다.
그 이유는 지역의 지형과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추대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힘의 뒷받침으로 마찰을 줄일 수 있고 지역의 특성을 잘 이용하므로 보다 지혜롭게 통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추장이 할 수 있는 통치는 소규모 자치 제도 이지만 보다 크고 중대한 일이나 일반적인 생활에서 주변과 협력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일이 많다.
각 종족간의 질서 유지와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서로 필요에 의해서 연계 협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수하게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은 병을 고치는 의사(무당(巫堂)이 의사 임)를 부르는 위급한 일이나, 지역적인 토산물을 사고파는 장날의 교류, 마을 단위의 축제 등 기초적인 교류는 일정한 날과 위치에서 거래나 협동이 최소한 이루워 지고 있었다.
각 지역마다 생산되는 물건이나 생필품이 있기에 이를 서로 매매를 하지 않으면 수급에 어려움이 있기에 시장에서 서로 거래가 이루워 지고 있었다.

(5) 이원화 된 맥국의 통치 제도
파푸아 뉴기니와 맥국과는 모든 것이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위와 같이 운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맥국이라는 큰 힘을 가진 국가는 수많은 병력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여러 층으로 계급화 하였지만 소국과 같은 추장들 까지 직접 통치를 할 수 는 없었다. 특히 강원도에는 맹수가 많아 속담에 한번가면 오지 않는 사람을 두고 강원도 포수(砲手) 라는 말이 있을 만큼 총포를 갖고서도 맹수의 위협에서 제약을 받았던 것이며 그 당시로서는 위험성이 많기에 한정된 생활권을 쉽게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위와 같은 모든 문제점에서 맥국의 변방에는 하부 조직인 추장들이 독자 또는 몇 개의 단위로 연합하여 활동하게 되며 이들을 외부에서는 말갈이라는 범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오지의 산골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단위 조직 체계의 연합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활동 할 때 가 많기에 외부에서 볼 때는 이들의 출처를 알 수 없기에 범칭으로 말갈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의 중심에는 맥국이라는 국가 단위가 있었고 그 하부에는 삼한의 소국과 같은 집단을 추장이 다스렸던 것이다.

즉 병력이 많으면 이를 계급화 하지 않으면 다스리기 어렵기에 맥국에는 거수라는 추장보다 선진적인 관직이 있었던 것이다. 추장은 원초적인 우두머리로서 자치 분권의 고대 전통적인 대표자에 속하는 구성체이다. 큰일이 있을 때는 연맹체를 구성 하였다 일이 끝나면 흐트지기 에 일정하게 지칭하기가 어려웠던 점에서 말갈이라는 명칭으로 표현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앙에는 맹주국이 있어 항상 통치의 중심에서 세력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말갈 중에서 제도적인 명칭인 장군(將軍)과 맥국에는 거수(渠帥) 라는 체계의 지휘자가 있었으며 이러한 면에서 그 중심에는 왕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북쪽에 있었던 말갈의 통치제도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다.

『수서(隋書)』말갈전에는 “말갈은 고구려 북쪽에 있다 읍락마다 추장(酋長)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괄이 되지 않는다”

『북사(北史)』말갈전에는 “수나라 개황(開皇)(581?600년) 초에 여러 부족들이 서로 어울려서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위의 말갈은 고구려 북쪽에 있는 말갈이지만 이들의 조직 체계에서 맥국의 말갈을 알 수 있는 내용이며 사신을 보낼 때도 여러 추장들이 서로 논의를 하여 보낼 정도로서 파푸아 뉴기니와 같은 협력체임을 알 수 있다. 맥국의 하부 조직에는 추장이 있었으며 지형 구조상 이러한 통치 체계로 운영이 되었기에 후일의 사가들이 범칭으로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기록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 평야 지대는 진국(辰國)이라는 국가 내의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의 행정 조직아래에 78개의 작은 소국이 연맹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맥국을 중심으로 추장 연합체가 조직 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말갈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특성에서 이름 지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추장 통치가 후진적인 방법이 아니라 지역 특성에 알맞게 단위를 조성한 것으로 자치 통치에 보다 책임성이 강하도록 구성한 전통 방식의 제도였다.

많은 사람을 통치 할 때는 계급화 된 관료 조직으로 운영 할 수밖에 없기에 맥국은 거수(渠帥)라는 보다 체계적인 통치자가 있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17년(40년) ,19년(42년) )

맥국의 하부 조직에는 추장이 다스린 부족이 많았던 것이며 이들을 말갈이라 불렀고 때로는 중앙에서 통치한 맥국 까지도 말갈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나의 예로서 발해라는 국가 이름이 있었어도 중국의 사서에는 발해를 “발해 말갈”이라고 지칭한 기록이 있고 맥의 하부 조직에 말갈이 존재하여 “맥의 말갈”이라는 복합명칭이 요구되고 있다.

위와 같이 맥국은 직활 맹주국이며 그 하부에 지방분권 조직인 말갈 추장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맥국의 왕도를 찾아낸 결과 규모나 도시 구조 나타나는 많은 현상에서 거대한 세력권의 고대 왕도라는 것이 밝혀지기에 말갈과 연결된 관계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역 특성상 70%가 산악지대이며 그 중심에 맥의 말갈이 있었기에 민족사의 일부로서 소흘이 할 수 없는 역사이다.

비중이 높은 민족사로서 우리 역사에 끼친 중요성은 삼국과 함께 오랫동안 존재 하면서 고구려와 함께 발해를 세운 민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