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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고분>


백제 금성분(金星墳) 연구 (일명 : 전방후원분)


<사단법인> 백제문화 연구회


회장 한 종 섭 글

7. 백제와 금성분

금성분 다인장 토광묘는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무덤 형식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석실 무덤과는 차이가 있는 고분이다. 우선 토광은 토착적인 무덤형식이며 이 무덤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당제를 지내 왔었다는 점에서 백제 초기의 토착민 수장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금성과 관련된 고대 천문관측의 문화가 발달 한 것은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금성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을 것이며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 넣었다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로 되돌아간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 고분은 호국의 별인 금성처럼 죽어서도 나라를 위해서 이 지역을 지키겠다는 뜻이 포함된 무덤형식으로 피장자는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던 관리로 볼 수 있으며 영혼까지 금성처럼 임무를 다하겠다는 뜻이다.

분명한 것은 통치자의 무덤으로 마을의 신으로 제사를 지내 왔었던 것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자연숭배 사상에서 별 중에 제일 밝은 금성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며 항상 태양을 따라 다니는 별로서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의 표상이 되었다. 왕은 태양신과 관련된 지상의 태양으로 추앙을 받은 만큼 태양 주위를 떠나지 않은 금성은 호국의 상징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금성과 관련된 사상은 금성분이 조성되기 훨씬 이전에 국가가 탄생하면서 하늘의 섭리를 따르고자 정립되었던 사상이다. 그러나 크게 활성화하여 금성분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 초기라는 것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앞으로 부여나 고구려 지역에서 방대한 금성분이 발견이 되지 않는 다면 백제 초기가 이 고분의 절정을 이룬 무덤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남시 이성산성에서 발견된 부여족 무덤은 방형(方形)의 다인장 무덤으로서 토광 위에 돌을 깔고 그 위에 봉토를 한 무덤 형식으로 만주 에 있던 부여족의 묘제이다.

그렇다면 부여에서 남하하여 백제를 세운 부여족의 무덤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 단편적으로나마 비교가 되고 있다 또한 이성산성의 9각지 동쪽에 작은 금성분이 발견되어 발굴한 결과 8각으로 조성된 금성분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묘제에서 알게 된 것은 백제 초기는 다양한 무덤이 시행되었음을 알수 있으며 앞으로 금성분에 대한 연구를 보다 심층적으로 한다면 백제에서 변화된 과정을 알수 있을 것으로 예측이 된다.

이러한 예측이 가능한 것은 백제 문화권에서 다양한 형태의 금성분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변화 과정을 보다 연구를 한다면 이에 대한 근원까지도 밝힐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조사에서 알수 있었던 것은 금성과 관련된 성격은 국가를 위해서 종사하였던 수장급(首長級)의 무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8. 강동구와 하남시 소재의 금성분 현황

일본의 거대한 금성분의 위치를 살펴본 결과 대부분 고분이 군집으로 무리를 지어 있으며 특히 거대 고분은 왕도 주위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동안 강동구 능골에서 금성분 1호분이 발견되어 실마리가 되었고 이것을 근거로 이러한 고분이 하나만 있지 않고 일본처럼 고분군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을 두고 세밀하게 주변을 확대조사 하게 되었다.

능골 1호분이 실마리가 되었던 것은 우선 뚜렷한 능이 없는 곳임에도 강동구 강일동과 암사동을 능골, 소능골 이라는 땅이름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외형이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같은 능을 찾은 후에 조사한 결과 방분의 위치에서 원분을 향하여 당산제를 오랫동안 지내온 것이 조사되었고 제사 지내는 날짜는 7월 1일이나 그 다음날로서 시간은 해질 무렵에 시작하여 밤에 지내는 특이함과 제물로는 소 한마리를 잡아서 각 부위를 고르게 진설(陳設)하며 제단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점에서 일반 당산제와는 달리 죽은자에 대한 제사임을 알게 되어 정밀 조사를 하게 되었다.

금성분이 위치한 입지의 구조에서도 왕도 주변으로 거리와 위치 등에서 일본의 사카이(堺)시에 있는 거대 고분군들과 유사하다. 일본의 오사카(大板)에 있는 인덕(仁德)천황능의 위치가 하천이 어우러지는 벌판에 큰 능이 있고 주위에 작은 금성분이 위치해 있으며 이러한 고분의 주위에는 두 줄기의 하천 석진천(石津川)과 신대화천(新大和川)이 에워싸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이 이곳 금성분 고분군의 위치도 망월천(望月川)과 고덕천(古德川)이 흐르는 그 사이에 거대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능골 1호분을 중심으로 주변의 지형을 세밀히 조사한 결과 파괴는 되었으나 금성분 가능지가 5곳 정도 발견되었다. 또한 하남시의 민둥산을 조사한 결과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크기가 인덕천왕능 보다 훨씬 큰 전장이 약 680m 정도의 규모이다. 또한 규모가 제일 큰 금성분은 강동구와 하남시 경계에 있는 황산 금성분은 전장이 약 77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금성분의 규모는 다양한 크기이며 파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 유적 등을 모두 합하면 원래 모두 수 십기가 있었던 것으로 1966년도의 항공사진과 현장 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분포 위치는 강동 능골 1호분을 비롯한 고분군들(현재 6호분 까지 가능지로 조사되고 있음)과 민둥산고분, 황산고분 간의 간격은 약 1km 이내의 거리이며 민둥산과 황산의 거리는 약500m의 거리를 두고 조성된 고분군들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하남시의 소형 금성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존에 있는 산을 손질하여 조성한 고분이며 나머지는 고덕천과 망월천 사이의 낮은 구릉지대로 지금은 대부분 집들이 들어차 있으나 인위적으로 조성한 금성분이 있었던 흔적이 여러 면으로 점차 밝혀지고 있다.

1966년의 항공사진으로는 금성분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낮은 고분은 대부분 집터나 농경지로 이용되어 흔적만 보이며 인위적으로 흙을 성토한 토축이 곳곳마다 발견되고 있다.
낮은 평지에 축조된 금성분도 모두 거대한 규모로서 백제시대 망월천과 고덕천 사이에는 모두 금성분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 아래 사진으로도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