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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고분>


백제 금성분(金星墳) 연구 (일명 : 전방후원분)


<사단법인> 백제문화 연구회


회장 한 종 섭 글

6) 각종 문헌 자료에서 본 암사동 금성분의 성격
암사동 고분은 처음으로 금성분이라는 개념에서 조사를 한 한강권의 유적으로서 지금까지 이와 유사한 형식의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는가에 대해서 짧은 기간에 조사한 문헌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지금까지 한강권에서 발굴한 금성분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는 없는 상태로 일제 시대에 발굴한 도면을 인용하여 강인구(姜仁求) 씨는 다음과 같이 내용을 밝히고 있어 참고가 되고 있다.

[토장(土葬)의 한강권 전방후원분]
- 현재까지 발견된 전방후원분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로 보는 것은 한강 유역의 석촌동 6 · 7호분이다.

이 고분은 일제시대에 발굴 조사 되었으나 보고서는 발간된 일이 없고 단지 실측도면 1매가 총독부의 『소화 2년도 조선 고적조사보고(昭和二年度朝鮮古蹟調査報告)』제 2책에 실려 있는데 그것으로 내부 구조를 짐작 할수 있다. 즉 6호는 약간의 돌이 섞여 있고 7호는 아무것도 없는 토장으로 되어 있다. 석촌동, 가락동에서 이런 내부 구조는 연대가 올라가는 고식(古式)인데, 유물이 많이 나온 가락동 2호분 보다 올라가는 형식이다.

한편 가락동 2호분에서는 철기, 토기 등이 여러점 출토된바 있는데, 가장 특징적인 유물은 흑도소호(黑陶小壺)이다. (『한반도의 전방후원분 논집』 123쪽 강인구 저) -

간단하나마 한강권에 금성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고 금성분 중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토장이 있었다는 것과 또 다른 고분에서도 흑도의 토기와 철기가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암사동 금성분과 비교를 한다면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최종규(崔鍾奎)씨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자연분구고총(自然墳丘 高塚)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발굴 내용을 밝히고 있다.

[자연 분구 고총]
- 남부 지방의 고총(高塚)은 3분해 볼수 있는데 Ⅰ류(類) 자연분구고총(自然墳丘高塚)은 성토(盛土)하지 않은 분구(墳丘) 즉 평야를 관망할 수 있는 소구(小丘)의 정상부를 매장부(埋葬部)로 선택하여 소구 그 자체가 성토 분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동시기(同時期)의 서민묘(庶民墓)는 토광묘(土壙墓)이다. 본류의 입지 선택은 일본의 초기고총(初期高塚)과 유사(類似)하다.(『도질토기 설립전야와 전개』224쪽 한국고고학보 12, 1982.) -

위의 내용은 남부지방의 고총에 대한 최종규씨의 견해로서 고분의 위치는 평야를 관망 할수 있는 자연 지형의 봉분을 이용하여 그 정상부에 매장을 한다는 것이 일본의 초기 고총의 입지와 같고 토광묘임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아래는 경주의 정래동(政來洞) 일대의 발굴 조사에서 나타난 것에 대한 박물관 신문의 내용이다.

[토광의 배치와 모양]

- 전체적인 형태가 전방후원형을 이루고 있는 고분으로 조사에서 확인된 것은 매장부(埋葬部)는 3기로 2곽(槨)과 3곽은 원구(圓丘)의 정부(頂部)에, 1곽은 정부에서 약간 내려온 곳에 위치하였다.(여기서 곽이라는 용어가 적당한 것인지는 자신 할수 없으나 잠정적으로 사용코자 한다) 원구와 평탄부(平坦部)를 연결하는 선은 동서(東西)이다.······

“2, 3곽 묘광(墓壙)의 길이는 폭(幅)에 비해 기형적으로 긴 형태로 이러한 것은 일본의 전기 고총(高塚)들의 묘광 평면 모습과 비슷하며 ······”(「박물관 신문」 139호 1983년 3월 1일) -

위의 내용들이 암사동 금성분에서 나타나는 배치 형태와 같으며 일본이나 우리나라 모두 자연 지형을 이용한 봉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3) 신라고분을 연구한 최병현(崔秉鉉)의 저서에는 아래와 같이 참고 할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지배자 집단 묘역]
-토광묘 시기에 있어서 영남지방은 물론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최고 지배자의 무덤이 다른 사람들의 무덤에서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으며 다음의 신라 전기에 와서도 신라의 중심지였던 경주 고분에서 조차 왕릉이 따로 독립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고분에서 정치적으로 최고 「우월자」의 무덤인 왕릉도 묘역(墓域)이 따로 분리되는 것은 신라후기 횡혈식 석실분 시기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지는 현상인 것이다.”(『신라고분연구(新羅古墳硏究)』61쪽 최병현(崔秉鉉) 저 일지사) -

[피장자(被葬者)의 두향(頭向)]
“지금까지 경주 일원에서 조사된 토광묘는 , 다만 정래동(政來洞) 1곽만 묘광의 장축 방향이 남북으로 되어 있어 하나의 예외가 있지만, 그 외에는 토광목관묘 단계와 토광목곽묘 단계를 불문하고 모두 토광의 장축이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다.···········.”
“경주를 제외한 영남 일원의 토광묘들도 대부분 장축이 동서로 놓여 피장자(被葬者)의 두향(頭向)은 동쪽에 두었다고 판단된다.”(위책 77쪽)
[토광의 깊이]
“지금까지 경주 일원에서 조사된 토광목곽묘 단계인 토광묘들을 보면 대부분 묘광의 깊이가 발굴 당시 지표하 50cm~60cm로 얕게 되어 있다.” “물론 조사 당시 남아 있는 묘광벽의 높이가 원래 상태는 아니고 묘광벽 상부가 상당부분 유실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위책 62쪽)”

단편적인 내용만을 간추린 것으로 위 세분의 견해를 살펴보면 이곳 암 사동 고분의 형식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강인구씨의 내용은 한강권에 전방후원분의 구조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고식의 토광묘가 있었다는 것과 부장 유물이 빈약한 것으로『소화2년 조선고적조사 보고서』를 인용하였다.

최종규씨는 경주 정래동(政來洞), 한 산의 정상부에 배치된 전체적인 형태가 전방후원분형을 이루고 있는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를 두고 산(山) 자체를 분구(墳丘)로 판단하여 자연분구고총(自然墳丘古塚) 이라는 개념으로 일본 고분시대 전기(前期)의 전방후원분과 같다는 입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전방후원분의 묘곽의 배치와 묘광의 깊이와 길이 등이 암사동 금성분과 같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최병현씨는 신라 초기에는 최고 지배자라 할지라도 따로이 조성된 예가 없었다는 것과 후기의 횡혈식석실분이 되어야 고분이 독립이 된다는 것이며 또한 장축의 방향이 대부분 동서 방향이라는 것이다.

암사동의 금성분은 위의 내용들과 같으나 표현에서 달리하는 것은 기존에 있는 자연 지형을 손질하여 축조한 분구 묘로서 순수 자연 지형은 아닌 것이다.
즉 자연과 인위가 결합된 “자연보축(自然補築) 금성분”이라는 용어가 알맞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7) 암사동 다인장 금성분의 성격
짧은 기간에 연구 조사를 하였지만 지금까지 암사동 금성분에 대한 연구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한다면 다음과 같다. 주변에 많은 양의 기와편과 유물, 소능골, 도당고개라는 지명이 있어 고대는 능과 관련된 신사나 능사(陵寺)가 있었던 것이며 그 이후론 마을 보호의 신으로 당제를 지내왔던 곳임을 알수 있다.

이는 강일동의 금성분과 같이 마을 공동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그 지역의 신(神)을 모시던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국가에는 국가의 신을 모시고 마을에는 마을신을 모셨던 것으로 이곳 은 마을 제사를 지내왔던 곳이다.

암사동 금성분의 위치적인 입지는 한강수로의 중요성과 강 건너 아차산과 마주보는 곳으로 몽촌, 풍납, 천호, 암사토성이 둘러싸여 있고 또한 성안에 조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호성이 강한 고분이다.

다인장이라는 무덤 형식과 호국과 관련된 금성분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을 통치하는 수장(首長)들이 죽으면 이곳에 묻어두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당제를 지내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 당제는 그 주변에 사람이 살수 있는 기반의 농토가 있는 이상 지속될수 있기에 지금까지 마을 당제(堂祭)를 지내온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