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연구회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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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대의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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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고분>


백제 금성분(金星墳) 연구 (일명 : 전방후원분)


<사단법인> 백제문화 연구회


회장 한 종 섭 글

5. 암사동 금성분의 성격과 유물, 유적의 학술조사

암사동 유적을 조사하게 된 것은 금성분일 가능성이 많은 유적으로서 도로 확장 공사에 포함되어 없어질 유적이기에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구제 차원에서 보존하기 위해 사회단체가 분쟁을 하여 밝혀낸 유적이다.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단체의 한시적인 확인 굴착으로서 조사가 끝난 후에 백제문화연구회에서 현황 조사와 발굴 당시의 사진과 발굴후의 수습 조사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을 토대로 연구를 하였다.

위치는 암사동 선사유적지 동쪽 신암중학교 뒤편에 작은 야산이 남아 있는 곳이다. 도로 공사에 의하여 머리 부분은 3분지 1과 꼬리는 대부분 없어지고 겨우 흔적만 알수 있도록 조금 남아 있는 야산이다. 총길이는 약 131m이며 머리쪽 원분의 직경은 68m, 꼬리의 길이는 63m로서 강동구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금성분 중에서 규모가 제일 작으며 꼬리의 폭은 알수 없도록 파괴 되었다

이곳은 소능골, 도당고개, 연못뚝길 이라는 땅이름이 남아 있고 인근에는 볕우물이라는 고대의 샘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은 한강변 벌판이 펼쳐지는 곳으로 서쪽에는 천호동과 풍납토성으로 이어지는 곳이며 북쪽과 동쪽은 암사동 강변 야산 지대로 연결 되어 있다. 한강 건너에는 아차산이 마주 보이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곳 주변에서 “북한수국해구선(北漢受國蟹口船)”이라는 백제시대의 와편이 채집된 곳이며(『한국고대사 연구』496쪽 이병도) 앞쪽 천호동의 강변에는 1966년도의 항공사진에는 풍납토성과 같은 규모의 토성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고 원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지하 1.5m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이 발견된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또한 남아 있는 금성분 주위는 강변쪽이 토성으로 에워싸인 곳으로 지금도 토성의 일부가 서북쪽 100m 정도의 지점에 일부가 남아 있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야산의 흔적을 금성분으로 보게된 것은 아래와 같은 조사에서 가능성 있는 곳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1)1966년의 항공사진에서 금성분의 형태가 남아있다.

(2)실물에서 원형의 머리와 꼬리를 알수 있는 형태가 부분적이나마 완연이 남아있으며 특히 원형은 자연의 현상에서는 조성될수 없 는 형태이고 꼬리 모양까지 결합된 것은 더욱 자연적일수 없으며 인위적으로 조성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3)금성분이 집단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강일동 1호분과 비교를 하면 능골 지명과 마을 제사를 지내온 흔적의 땅이름 등이 같다.
금성분 주위에 “소능골”과 “도당고개” 라는 땅이름이 남아 있어 강 일동 당산제를 지내온 능골의 금성분과 유사성이 있는 곳이다.(마을 당제를 지낸 곳이며, 능골 땅이름과 금성분의 인위적인 형태 조성 등)

(4)금성분이 많이 조성된 위치가 물이 가까운 위치와 군사적으로 중요 한 곳이며 집단 거주지역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호국적인 금성분 의 가능성이 농후한 지역이다.

(5)금성분의 표면 조사에서 삼국초기의 연질 토기편이 산재되어 있고 주변에서 많은 기와가 산재되어 있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유물과 증언에서 고대의 흔적이 남아있어 삼국시대 이후에는 지형의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6)금성분 머리부분의 상부에는 멀리서 운반해온 검은색의 흙이 깔려 있었다.

위와 같은 현황에서 금성분이라는 묘제를 알게 되었으며 특히 강동구와 하남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금성분이 한두개 모양은 우연의 일치이거나 자연적으로 같은 모양이 있을수 있다고 생각할수 있지만 10여개의 형태가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금성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상기와 같은 현상이 강일동 능골 1호분의 현상과 같다는 것도 더욱 더 금성분이라는 것을 복합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6. 암사동 유적의 현황 연구

1) 토광묘 금성분
금성분(일명: 전방후원분)이라 하면 석실을 연상하게 되지만 이곳에서 는 다인장(多人葬) 토광묘(土壙墓)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사회단체가 굴착한 이후에 그 당시에 찍은 현장 사진을 검토하여 토광 의 흔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지점을 조사한 결과 아직 발굴되지 않은 토광묘 1기의 매장 부분인 토광이 남아 있기에 실증적으로 입증되는 토광묘가 발견되었다.

위의 토광은 금성분 머리와 꼬리로 연결되는 목 부분에 위치한 고분으로 봉분이 없는 배총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또한 배총의 위치가 금성분을 지키는 위치에 조성되어 있어 피장자 와 동시대의 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의 고분에서 알수 있는 것은 고분 앞에 석물로 무인석(武人石)이나 문인석(文人石)을 배치하여 고분을 지키는 형상과 같이 초기에는 피장자를 평소에 보좌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문 앞에 해당되는 입구에 묻었던 배총(陪塚)으로 보여 지는 위치이다. 발굴과 지형의 조사에서 나타난 토광의 위치와 현황을 살펴보면 아래 그림과 같다.

< 그림1 >토광묘가 발견된 위치의 금성분
암사동 227-1번지 동경127 ?10′ 북위 37 ? 33′ 해발 29.2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