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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국(貊國) 왕도 유적 조사에 대하여

                                                    <사>백제 문화 연구회

                                                                        회 장 한종섭

- 머리말 -

1. 춘천 맥국과 말갈
2. 산악지대와 고대 국가
1) 맥국과 말갈의 관련성
2) 맥국과 말갈의 통치 구조
3) 파푸아 뉴기니의 추장제도에서 본 말갈의 추장
4) 말갈 추장제도의 지속성
3.말갈은 우리민족인 동이족의 갈래이다.
1) 맥국 명칭에 대하여
2) 춘천 맥국의 전통성
4. 춘천 발산리 건물지를 맥국 왕궁지로 보는 이유
5. 맥국의 수리봉 산성
6. 맥국 유적에서 본 유의 점
< 맺는 말 >

- 머리말 -

백제 초기의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를 하던 중에 관심을 갖게 된 국가는 백제초기에 함께 공존하였던 국가로서 마한과 말갈, 낙랑 등이다.
백제 500년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한지 12년만에 마한의 왕도를 찾아낸 후에 백제를 끊임없이 공격해온 말갈에 대한 실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춘천 맥국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맥국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내용은 미미한 수준으로 실체를 알 수 없으나 맥국과 위치가 중복되는 말갈과 관련된 기록은 어느 정도 실체를 밝히고 있다.

특히 말갈은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역사에서 말갈에 대한 내용은 삼국초기에서부터 멸망 할 때 까지 『삼국사기』에 기록될 만큼 비중 높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 측의 기록에는 고구려의 북쪽 옛 숙신국(肅愼國) 지역에 있었던 물길(勿吉)에 대한 기록은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고 있으나 말갈에 대한 기록은 7세기 당나라의 학자인 리백약 이 편찬한 『북제서』권7 무성제 하청2년 (서기 563년)조의 끝에 “이해에 실위 ,고막해, 말갈, 거란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였다” 이것은 중국 측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기록으로서 우리나라 사서 보다 600년이나 뒤 늦게 나타나는 기록이다.
이러한 면으로 본다면 말갈이라는 명칭은 중국보다 우리와 더 밀접한 어원이다.

문헌 기록 내용에서 가야는『일본서기』에 의하여 어느 정도 실체를 알 수 있으나 맥국 또는 말갈은 삼국보다 더 역사성이 깊었어도 이에 대한 기록이 많이 전해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삼국의 중앙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이어온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고 맥국 왕도의 발견으로 맥국과 말갈이 어떤 관계 였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맥국을 이해 할 수 있다.

말갈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위치적으로 관련성이 있는 맥국의 왕도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며 올바른 역사를 정립 하는데 기본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에는 개발로 인하여 곳곳마다 지형이 교란 파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도는 다른 유적과 달리 한 국가의 사상과 세력의 규모 등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증거로서 고대사를 밝히는 데 그 중요성은 비할 데 없다.
특히 다른 나라로부터 역사 왜곡의 침략을 장기간 받아온 우리의 현실은 은연중에 왜곡된 역사를 받아 들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유적이다.

왕도의 유적은 민족과 국가의 이력서와 같고 지방 자치 단체로서는 지역문화의 구심점과 관광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돈으로 환산 할 수 없을 만큼 부가가치가 높고 최근에는 지역 또는 국제간에 문화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한 문화 자원 경쟁에서 활용도가 급격히 증대되고 있다.

맥국은 지형적인 여건으로 본다면 춘천에 인류가 터전을 잡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전통성을 이어 온 원류 세력의 기반이 장구한 기간에 조성되어 왔던 곳이다.
맥족 이라는 민족의 원류가 춘천에 지속적으로 생활 터전을 유지해 왔던 것은 지형적으로 외침이 어려운 곳이기에 고조선 보다 앞선 맥족의 전통성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국가로 보여 진다.
맥국을 알고자 한다면 위치적으로 말갈과 중복 기록되어 나타나는 현상에서 말갈과 어떤 관계 인가를 우선 알아야 만이 맥국에 대한 실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혼란이 되었던 것은 범칭으로 사용된 말갈은 여러 종류가 있고 지역의 분포도 여러 곳으로 비정되어 있으며 관련유적에 대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아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말갈이 막강한 세력을 갖고 활동하면서 존재한 시기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삼국사기』백제사에는 의봉년간(676?679) “당의 무후가 그의 손자 부여 경으로 하여금 왕의 관작을 이어 받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지역은 이미 신라, 발해, 말갈 등으로 나누어지고 계통이 드디어 끊어 졌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 백제의 땅을 차지한 신라, 발해, 말갈이라는 내용은 분명히 백제와 가까이 있는 말갈을 의미 하는 것이다.
신라, 발해와 함께 백제의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던 말갈은 강대한 힘을 가진 것을 알 수 있고 백제 땅 일부를 영토로 정하였던 것이다.
맥국과 말갈은 어떤 관계이며 동일한 세력이라면 맥국을 왜 말갈이라는 범칭으로 사용 하였을 까 하는 의문이 앞서기에 이를 먼저 알지 않으면 맥국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맥국의 왕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규모가 얼마나 크며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느 때 까지 존속 하였는지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맥국과 관련된 깊은 내용을 모르면 찾아 가려고 하는 주소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이해하기도 어렵다.

1. 맥국 과 말갈

맥국은 어떤 종족이며 왜 춘천에 원류적인 우리 민족 시원의 뿌리가 오래도록 정착 할 수 있었든가 예족과 맥족은 고조선 보다 앞선 종족의 이름으로 그 근원은 동이족 의 한 갈레로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토착 종족이다.
춘천에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밀집된 곳으로 이곳에는 한번 들어오면 외부와 단절된 지형에서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살아 갈수 있었고 이러한 안정된 환경에서 존속 기간이 길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부 지역에 나타나는 말갈과 싸운 기록에서 산악지대인 춘천 맥국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다루왕 3년(30년) 다루왕 29년(56년) )

강원도의 지리적인 면에서 큰 고대국가가 도읍을 정할 수 있는 입지는 한정되어 있는 곳이며 백제의 동부지역은 분명히 산악지대인 강원도이며 이곳에서 말갈과 싸웠다는 것은 맥국의 중심인 춘천 지역의 세력과 오랫동안 싸웠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맥국과 말갈은 관련성이 있는 동일 세력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말갈이 신라의 변경인 강릉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다.

(1) “당나라 현경 3년(658)에 하슬라 지역이 말갈과 연이어 있다 하여 소경을 폐지하여 주를 만들고 군주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하슬라는 강릉의 옛지명)『삼국사기』지리지 명주 조.

(2)신라 군사 제도의 6정(停) 9서당(誓幢)편에 “ 6은 흑금서당(黑衿誓幢)으로 신문왕 3년(683년)에 말갈 국민으로 당(幢)을 만들었는데 ·······”(『삼국사기』제 9 직관 下)

위의 두 기록은 말갈이 강릉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과 말갈이 신라의 지배를 받으나 따로이 분리 통치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기록으로서 춘천의 입지를 생각할 수 있다.
백제를 수시로 공격을 하였고 7세기 말에는 신라의 통치에 들어갔으나 따로이 행정조직을 구성할 만큼 구분된 통치를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지금까지 말갈족이라 하면 북방 민족의 범칭으로 생각을 하였으나 맥족이 고구려를 세웠고 고구려와 말갈이 발해를 세운 것으로 말갈도 우리민족이라는 것이 맥국의 왕도 발견에서 연결되고 있다.
말갈족의 분포를 보면 대부분 산악 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활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험준한 산과 강을 잘 이용한 민족임을 알 수 있다.

특징으로는 삼국인은 머리 양쪽에 새털의 깃을 꼽고 있으나 “말갈인은 머리에 호랑이나 표범의 꼬리를 달고” 다닌다는 기록에서 도 사냥을 잘하는 용맹성을 알 수 있다.(『위서』물길전 )
백두산과 연결된 백산 말갈이 주체가 되어 발해를 세웠다는 점에서 산악지대로 연결된 춘천 맥국의 말갈과 한 갈래의 종족으로 이어지는 특성이 있다.
인류 초기의 생업은 채집과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 하면서 살아온 것으로 생활 방식은 시원의 전통성을 제일 오랫동안 유지한 민족 이다.

우선 맥(貊)이라는 한자의 뜻글자를 오랫동안 사용한 것도 이러한 용맹성과 사냥을 잘하는 산악인의 특징에서 북방종족 이름 과 맹수 이름으로 사용한 “貊”(북방 종족, 맹수의 이름)의 뜻글자이다.
중국 측에서 는 맹수처럼 위협적인 이름으로 표현한 동이족 원류의 종족으로 보았다.
이와 함께 말갈은 산악전에서 뛰어나고 고구려와의 연합에서 선봉이 되어 동이족 중에서 제일 용맹성이 있는 종족이라는 것을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삼국과 함께 장구한 역사 기록에 남아 있고 우리나라는 70%이상이 산악지대로서 산악 중심 국가라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러한 바탕에서 말갈의 문화는 중국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기후가 따듯한 남쪽 산악 지대가 중심권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 “백제 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의 성을 빼앗으니 신라왕 김춘추 가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 본기 보장왕 14년(655) )
위와 같은 기록에서 말갈은 백제, 고구려와 동맹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궁지에 처하도록 하였다.
말갈과 맥국은 단절된 지형에서 역사가 외부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소략하게 전해져 왔던 것이다.